[다산 칼럼] 취임사에 예견된 '경제 실패'
문재인 정부 2년의 경제 실패는 취임사에서부터 예견됐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선언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좌파 설계주의’의 발로다. 이는 좌파 합리주의가 표방하는 ‘이성(理性)에 대한 무한신뢰’를 의미한다. 문재인 정부는 ‘국민의 삶을 책임지는 국가, 최대의 고용주로서의 국가’를 자임했다. 그 결과 시장은 질식됐고 정부 규모는 급격히 팽창했으며 국민의 국가에의 의존은 타성화됐다.

문재인 정부 2년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한·미 간 성장률 역전이다. 2018년 한국의 경제성장률(2.66%)은 미국(2.89%)보다 낮다. 2019년 1분기 한국은 전(前)분기 대비 마이너스 0.3%의 역성장을 했지만 미국은 1분기에 연율 3.2%의 성장세를 이어갔다. 미국과 한국이 선택한 친(親)시장·감세정책과 반(反)시장·증세정책이 운명을 갈랐다. 이는 문재인 정권이 자초한 것이다. 가계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해 소득의 선순환을 꾀하겠다면서 증세를 꾀한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소득주도성장은 논리적으로 감세 기조 하에서 작동하게 돼 있다.

설계주의가 빠지기 쉬운 함정은 편의주의다. 문재인 정부는 ‘포스트 케인지언’의 ‘임금주도성장’을 차용하면서 자영업자를 의식해 임금주도성장을 ‘소득주도성장’으로 임의로 비틀었다. 편의적으로 변용된 소득주도성장이 문재인 정부의 명실상부한 ‘정책 플랫폼’으로 기능한 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논리적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소득주도성장은 정치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 안에 대중이 반길 만한 것이 내재돼 있었기 때문이다. 대중은 소득주도성장을 통해 그동안 들어왔던 ‘생산이 먼저이고 분배가 나중’이라는 통념이 뒤집히는 것을 목도했다. ‘분배를 통해 성장을 꾀하겠다’는 데 대중이 반기지 않을 리 없다. 소득주도성장은 인기를 등에 업고 거침없이 ‘정책의 옷’을 입었다. 지난 2년간 최저임금은 29.1% 인상됐고 사문화된 주휴수당은 법제화됐다. 이 정도면 ‘긴급 경제명령’과 다를 바 없다. 시장에서 결정돼야 할 생산요소 가격을 정부가 정치적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소득주도성장 주장이 완결되려면 “성장을 이끌기 위해 분배할 소득은 누가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도 함구하고 있다. 생산성 향상과 혁신성장은 구두선에 머무르고 있다. 노동생산성을 웃도는 최저임금 인상은 경제를 초토화시켰다. 전년 동월 대비 3000명 고용 증가라는 2018년 8월의 고용 쇼크는 통계청장까지 경질하게 했다. 최저임금 인상발(發) ‘고용 참사와 소득분배 악화’는 취약한 계층을 회복 불능의 상태로 몰고 갔다.

정책은 언제 어디서나 기대하는 대로 작동하는 ‘요술지팡이’가 아니다. 따라서 정책 실패 조짐이 보이면 궤도를 수정해야 한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소득주도성장 감싸기에 여념이 없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2월 인터뷰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보완해 나가야 하지만, 더 강화해야 할 부분은 속도를 내서 강화해 나가겠다”고 밝히며 고집을 부리고 있다.

문재인 정부에 대해 절망하는 이유는 그들의 ‘정책 교정 능력’ 부재 때문이다. 2030세대는 문재인 정부에는 ‘아픈 손가락’이다. 일자리를 창출하고 그들과 소통하기 위해 청와대에 청년비서관을 신설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청년비서관이 없어 청년이 고통받는 것은 아니다. 문제의 근원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선악 구도로 보고 비정규직을 없애 노동시장에 새로 진입한 청년에게 고용 기회를 제한했으며, 최저임금을 너무 급작스럽게 올려 저숙련 그리고 일부 저학력 청년의 취업을 좌절시킨 것이다. 문제의 원인을 보지 못하고 비서관을 신설해 현실을 개조하려 한다. 경제수석, 일자리수석, 자영업비서관, 청년비서관을 두면 빛 샐 틈 없는 고용 조직이 만들어지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반(反)기업 정서에 기댄 인기영합적 정책을 전환하지 않으면, 또 설계주의와 전체주의적 사고를 버리지 않으면 경제는 침몰할 수밖에 없다. 문재인 정부는 자칫하면 부모 세대보다 못 사는 자식 세대라는 비극의 길에 첫발을 떼게 한 경제 난독증의 무능한 정부로 기록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