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5·4운동' 100주년
1919년 5월 4일 오후, 중국 베이징 톈안먼(天安門) 광장에서 대학생 3000여 명이 반일(反日) 시위를 벌였다. ‘독일이 갖고 있던 산둥성 칭다오(靑島) 일대 조차권을 일본에 양도한다’는 파리강화회의 소식에 격분한 이들은 “칭다오를 반환하라!” “매국노를 타도하자!”며 군벌정부의 친일 관료 파면을 요구했다.

군경에 저지당한 학생들은 친일파 관리의 집을 불사르고 일본상품 불매운동에 나섰다. 군벌정부가 학생운동 금지령을 내리고 파리강화회의 조약을 받아들이기로 하자 이들은 동맹 휴학에 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1000여 명이 체포됐다. 분노한 상인과 노동자들이 시위에 가세했다. 상하이에서는 노동자들의 파업(罷工)과 상인들의 철시(罷市), 학생들의 동맹휴학(罷課)을 아우른 ‘3파(罷) 운동’이 일어났다.

저항의 열기가 주요 도시로 퍼지자 정부는 손을 들었다. ‘매국노’로 지목된 친일 관료 3명을 파면하고 파리강화회의 조인을 거부했다. 5·4운동은 이렇게 외세와 군벌정부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했다가 반제국주의·반봉건주의 혁명운동으로 확산돼 갔다. 역사학자들은 이 운동의 배경으로 조선의 3·1운동과 러시아 혁명을 꼽곤 한다.

당시 베이징대 교수 천두슈(陳獨秀)는 잡지에 “조선의 독립운동은 위대하고 성실하고 비장하다. 3·1운동의 영광을 보며 우리는 그렇지 않은 것에 수치를 느낀다”면서 민중의 궐기를 촉구했다. 이들의 전국적인 저항 이후 1921년 중국 공산당이 창설됐고, 국민당과의 합작·대립이 이어졌다.

엊그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100년 전 일제에 저항한 5·4운동 기념 연설에서 ‘항일(抗日)’을 한 자도 언급하지 않고 애국심만 강조했다. 미·중 무역전쟁 과정에서 일본과의 관계 강화를 꾀하는 한편 내부 단속까지 겨냥한 발언으로 받아들여졌다. 다음달 톈안먼 시위 30주년을 앞두고 다시 꿈틀거릴지 모르는 학생운동에 대비한 포석이라는 외신 분석도 나왔다.

중국은 올해 5·4 운동 100주년뿐만 아니라 건국 70주년, 티베트 봉기 60주년을 맞는다. 정치와 경제 양쪽으로 예민한 시기여서 정부의 신경이 날카롭다. 노동절(1일) 다음의 2, 3일을 임시 휴일로 정해 5·4기념일까지 황금연휴에 포함시킨 것도 시위를 우려한 조치라고 파이낸셜타임스는 보도했다.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