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과 전망] 北核 '희망 고문' 내려놓을 때
지난해 4월 27일 판문점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 지 1년이 지났다. 북핵 해결의 실마리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 12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미국이 요구하는 비핵화 방식을 ‘선(先) 무장 해제, 후(後) 제도 전복’ 음모라며 거부했다. 비핵화가 북한의 근본 이익에 배치되는 요구라는 것이다. 국가 이익에 대해서는 “티끌만 한 양보나 타협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김 위원장은 이 같은 생각을 지난 25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도 밝혔다. “미국이 일방적이며 비(非)선의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최근 조선반도(한반도)와 지역정세가 교착상태에 빠지고 원점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위험한 지경”이라고 한 것이다.

김 위원장은 북·러 정상회담에서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유달리 강조했다. 이와 관련, 북한을 대변하는 재일본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의 지난 14일자 기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북한이 제재 해제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면 미국은 다른 방식으로 대북 적대시 정책 철회 의지와 관계개선 의지 그리고 비핵화 의지를 증명해 보이라고 한 것이다.

즉, 미국에 대북 적대시 정책 철회를 통한 새로운 미·북 관계 수립을 요구한 것이다. 그리고 주한미군 철수와 한반도 및 그 주변의 핵 타격 수단 철수 혹은 전개 중지 등을 통한 평화체제 구축을 요구했다. 이것이 북한이 생각하는 ‘조선반도 비핵화’를 위한 미국 측 군사 분야 조치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20일자 북한 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에 따르면 ‘조선반도 비핵화’는 북한의 핵 억제력을 없애는 것이기 이전에 북한에 대한 미국의 핵위협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다. 미·북 간 비핵화 개념이 다른 것이다.

이 같은 발언의 전후 맥락을 보면 북한이 하노이 회담 결렬 후 대북제재 해제 대신에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전’ 그리고 ‘체제 보장’을 앞세우면서 협상의 판을 흔들려는 것이 읽힌다. 푸틴 대통령은 북·러 정상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비핵화를 위해선 북한의 체제를 보장해줘야 한다며 북한 입장을 지지했다. 6자회담의 필요성도 제기했다.

북한은 미국과의 실무협상을 거부하고 트럼프 대통령하고만 톱다운 방식으로 타결을 보려 한다. 따라서 6자회담에는 선뜻 응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압박을 돌파하기 위해서 차선책으로 6자회담을 활용할 가능성은 있다. 중국과 러시아가 북한이 원하는 단계별, 동시적 비핵화 방식과 대북제재 완화를 지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러 정상회담에서 나온 6자회담 발언은 북·중·러 공동전선의 토대가 되면서 미국에는 현재의 셈법을 바꾸라는 메시지가 될 수 있다. 미국에 대한 김 위원장의 불만을 푸틴 대통령이 대신 표현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미국은 푸틴 대통령의 6자회담 발언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북핵 협상에 중국과 러시아를 끌어들여 판을 흔들려는 김 위원장의 전략에 대한 한국의 태도다. 미·북 간 중재자 역할이 좌초된 상태에서 한국 정부가 다자간 협상방식을 돌파구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 1년간의 비핵화 협상을 보면 문제의 본질은 ‘스몰딜’이냐 ‘빅딜’이냐가 아니다. 미·북 간 양자회담이냐 6자회담이냐의 성질도 아니다. 김 위원장에게 비핵화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북한은 비핵화는커녕 핵무기 숫자를 1년 전보다 늘렸다.

이제라도 냉철하게 현실을 바라봐야 한다. 김 위원장이 그동안 남북 정상회담과 미·북 정상회담에 참여한 것은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서가 아니다. 대화와 협상에 참여한 대가로 양보와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였다. 한국 정부는 문제의 본질을 직시하고 희망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현실적인 대북정책 및 외교정책으로 난국을 헤쳐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