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갑영 칼럼] 왜곡된 포용성장 정책의 명암
“시장경제는 나 같은 사람을 부자로 만들 수 있으니 얼마나 훌륭한 제도인가. 그러나 때로는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거나 시장이 원활하게 작동하지 않아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나 같은 기부자가 필요하다.” 시장경제의 정곡을 찌르는 워런 버핏의 명언이다. 버핏은 15세에 25달러짜리 핀볼기계로 첫 사업(?)에서 성공을 거두고, 114.72달러로 주식을 시작해 825억달러(약 95조원)의 자산을 가진 세계 3대 거부가 됐다. 물론 그가 존경받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투자 기술보다 오히려 재산의 99% 기부라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수많은 흙수저가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성공할 수 있는 발판이 돼 왔다.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누구라도 버핏과 같은 부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도 1조원이 넘는 유니콘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들이 시장을 기반으로 탄생하고 있지 않은가. 역사적으로 시장체제를 유지한 국가가 지속적으로 높은 성장을 달성했고, 그 혜택으로 국민의 생활수준이 향상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경쟁이 치열해지고 시장의 역동성이 커지면서 승자독식과 ‘루저(loser)’의 증가가 중요한 사회적 현안으로 부각되고 있다. 많은 국가에서 성장의 과실이 적절히 분산되지 않고 소수에게 배타적으로 편중된다는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 이것이 바로 소외계층에도 경제적 번영의 혜택을 누리게 하자는 ‘포용적 성장’이 등장한 배경이다.

포용성장의 본질은 단순히 균등한 배분이나 부자 과세의 강화와 보편적 복지를 늘리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소외계층의 경제활동에 대한 참여와 고등교육의 접근성을 확대해 다양한 계층이 경제 시스템에서 능동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자는 것이다. 동시에 재정이 열악한 계층도 의료 서비스와 환경, 안전 등 모든 부문에서 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보장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포용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되는 보편적 복지나 임금인상 등은 오히려 배타적인 편중을 더 심화시키고 있다. 임금 인상에 기반을 둔 소득주도성장 역시 포용성장에 역행하는 결과를 불러오고 있다. 최저임금의 대폭적인 인상이 저임금 소외계층의 일자리를 앗아가 경제 시스템에 참여하지 못하는 루저를 양산하고, 그 결과 소득분배만 더 악화시키기 때문이다. 세금 주도의 일시적 고용창출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차라리 최저임금보다는 근로소득장려세제를 확대해 생계수준에 미달하는 근로자에게 세금 대신 정부가 직접 소득을 지원하는 정책이 훨씬 더 효과적이다. 일해야만 소득이 증가하니 근로 의욕도 높아지고, 기업의 임금 부담을 덜어줘 고용확대의 인센티브도 크기 때문이다. 소외계층은 일자리를 통해 경제활동에 참여하고, 세금 대신 소득 보전을 받기 때문에 분배구조도 개선된다. 재정 부담도 무차별적 시혜보다는 적고, 경제도 활성화되는 부수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포용성장을 위한 또 하나의 핵심 정책은 소외계층에 고등교육의 기회를 대폭 확대하는 것이다. 소득이 학력에 비례하고 고도의 전문성이 시장을 지배하는 승자독식의 시장경쟁에서 루저의 대물림을 막는 것이 포용성장의 핵심 아니겠는가. 안타깝게도 우리 현실은 획일적인 평준화 정책에 매몰돼 교육에서도 실질적인 포용을 찾아보기 힘들다. 어려운 계층이 정책적 배려로 명문대에 진학하고 신분 상승의 계기를 만드는 사례가 흔해져야 포용성장이 달성되지 않겠는가.

포용성장은 승자에 대한 일방적 규제나 보편적 복지, 평준화의 포퓰리즘으로는 결코 이뤄질 수 없다. 이런 정책은 오히려 성장 기반을 훼손해 침체의 고통을 소외계층에 가중시키고, 포용의 기회보다는 배타적인 차별을 확산시킨다. 따라서 포용을 위해서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성장의 기반과 소외계층 교육 기회 확대에 주력해야 한다. 버핏과 같은 자선가도 찾기 힘든 우리 현실에서 정부마저 포퓰리즘으로 왜곡된 포용정책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누가 배타적 성장의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낼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