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향기] 무대로 즐기는 판소리 뮤지컬 '적벽'
오나라의 책사 주유가 보낸 군사들이 숙소를 덮친다. 한겨울 동남풍마저 불러오는 신출귀몰함에 훗날 화가 될 것을 우려해 제갈량을 제거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제갈량은 이미 조자룡과 함께 멀어지는 선박 위에 올라있다. 잠시 기다리라고 소리치는 군사들에게 제갈량은 말한다. “그냥 어서 돌아가 바람이 멈추기 전 화공으로 적을 섬멸하라 전하시게.”

《삼국지》 ‘적벽대전’의 한 장면이다. 물론 지어낸 이야기라 더 흥미로울 수 있지만, 수많은 문화 콘텐츠를 통해 반복 재생산될 정도로 인기를 누린 박진감 넘치는 광경이다. 최근 앙코르 무대가 꾸며지며 애호가들의 발길을 유혹하는 대한민국 공연가의 흥행 콘텐츠이기도 하다.

‘적벽’은 물론 중국 소설 《삼국지》에 등장하는 ‘적벽대전’에서 따온 제목이다. 《삼국지연의》로도 알려진 원작 소설은 중국의 위, 촉, 오나라 삼국의 이야기로 오래 인기를 누려온 베스트셀러다.

14세기 작가 나관중이 장회소설(章回小說) 형식으로 편찬한 덕분이다. 장회소설이란 매회 끝을 “이 결말이 어떻게 될지 다음 회를 기다리시오”라고 매듭짓고, 다시 다음 장으로 옮겨가는 형식을 말한다. 아마 송나라 때 연단에서 강연자가 긴 이야기를 몇 회로 나눠 구연했던 것이 배경일 것이라 추측된다.

‘적벽’은 정동극장의 변화를 상징하는 작품이다. 돌담길로 유명한 덕수궁을 돌아서 걷다 보면 만날 수 있는 정동극장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사설극장인 원각사가 화재로 소실된 뒤 그 뜻을 이어받는다는 취지로 지어진 전통예술극장이다. 1995년 설립됐는데, 1997년 우리나라 최초로 전통예술을 관광상품화한 ‘정동극장 상설국악공연’ 프로그램을 운영해 왔다. 시대의 변화와 흐름에 따라 다양한 가무극 혹은 뮤지컬을 개발하는 전통을 잇고 있는데, ‘적벽’은 바로 그런 정동극장의 현대적 변화를 상징하는 대표적 콘텐츠다.

무엇보다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은 20여 명의 도창과 5인조 음악 반주가 빚어내는 신선한 조화다. 판소리 하면 도창과 고수만으로 무대를 꾸미는 모습을 쉽게 떠올리지만, 이 작품은 그런 선입견을 여지없이 깨뜨린다. 무대는 여러 명의 소리꾼이 마치 합창처럼 이야기를 재연해 시원스러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판소리 다섯 마당의 하나인 ‘적벽가’가 뮤지컬적 특성의 형식적 틀에 담겨 무대로 재연되는 별스러운 체험을 가능케 한다.

젠더 프리 캐스팅 역시 흥미로운 각색의 묘미를 담아낸다. ‘적벽’에서는 제갈량과 조자룡, 주유로 남성이 아닌 여성 출연자들이 등장한다. 특히 ‘삼국지’에 묘사된 것처럼 선이 고왔다는 제갈공명의 모습이 묘하게 교차돼 흥미를 더한다. 그래도 가장 큰 볼거리는 역시 판소리가 이미지로 구체화되며 느껴지는 판소리 뮤지컬 특유의 장르적 일탈과 파격의 실험이다. 구성진 남도 사투리가 버무려진 대사와 노랫가락이 젊은 소리꾼들에 의해 재연되는 장면 자체가 감탄이 터져나오는 매력이요 즐길거리다.

무대 한편에선 우리말 자막도 나온다. 원래 소리가 시작이고, 말이었던 무형 콘텐츠를 무대로 구체화했다는 의도를 느끼게 된다. ‘전통’ 하면 고리타분하다고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시비라도 걸고 싶어질 만큼 세련되고 근사하다. 좋은 창작 뮤지컬이 목마르다면 놓치지 말기 바란다.

jwon@sch.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