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경서동 경인주물공단의 한 폐업 공장. 자물쇠가 채워진 공장 문에 무단 출입을 금지한다는 경고장이 붙어 있다.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인천 경서동 경인주물공단의 한 폐업 공장. 자물쇠가 채워진 공장 문에 무단 출입을 금지한다는 경고장이 붙어 있다.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인천 경서동 경인주물공단. 2000년대 초까지 30여 개 주물업체가 자동차 선박 기계 등 각종 부품 주문의 납기를 맞추느라 밤낮없이 공장을 돌렸던 곳이다.

지난 19일 찾은 경인주물공단에서 과거의 활력은 자취를 감췄다. 한 주물공장의 철제 펜스 앞 ‘무단침입하면 법적 책임을 묻겠다’는 경고판만이 공단의 우울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제조업 뿌리' 주물공장…절반이 문 닫았다
최근 3~4년 동안 자동차 조선 등 전방산업의 침체와 최저임금 인상 등 경영환경 악화로 가동 업체는 16곳으로 줄었다. 전체 면적도 4분의 1 수준인 6만㎡로 쪼그라들었다. 공장 가동률은 60% 안팎에 머물고 있다. 금형과 도금 기업이 몰려 있는 경기 부천 오정산업단지와 안산 반월도금단지도 사정은 비슷하다.

한국 제조업을 떠받쳐온 주물, 금형, 도금 등 ‘뿌리산업’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국가뿌리산업진흥센터에 따르면 2017년 전국 뿌리산업 기업은 2만5056개로 2016년에 비해 731개 줄었다. 지난해에는 1000개 이상의 ‘뿌리기업’이 문을 닫았을 것으로 업계는 추정하고 있다.

뿌리산업발(發) 위기가 산업 전반으로 확산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젊은 세대의 기피로 인한 인력난도 심각하다. 경영환경 악화로 끝나지 않고 기술 단절로 인한 뿌리산업의 붕괴가 머지않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경인주물공단에 있는 대성주철의 내국인 근로자 평균 연령은 66세에 달할 정도다.

서병문 주물조합 이사장은 “마지막 남은 기술 프리미엄 영역인 뿌리산업이 무너지면 수출 경쟁력이 사라질 우려가 있다”고 경고했다.
< “주물업체 대부분 적자” > 뿌리기업인 주물업체들이 일감 부족과 원가 상승으로 적자에 시달리고 있다. 인천 경서동에 있는 한 공장에서 근로자가 선박용 엔진 주물 작업을 하고 있다.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 “주물업체 대부분 적자” > 뿌리기업인 주물업체들이 일감 부족과 원가 상승으로 적자에 시달리고 있다. 인천 경서동에 있는 한 공장에서 근로자가 선박용 엔진 주물 작업을 하고 있다.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車·조선 불황으로 주문 급감…금형 톱10 기업도 3년 연속 적자

경기 부천시 오정산업단지 내 한 금형업체 회의실. 벽면에는 ‘뿌리기술’ 전문기업 지정증과 강소기업 확인서 등 각종 인증서와 상장이 빼곡하게 걸려 있었다. 오정산단은 70여 개 금형업체가 몰려 있는 금형 특화단지다.

20여 년 업력의 A사 사장은 “기술력을 인정받아 관련 인증서 등을 땄는데 사업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됐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며 “금형업계 톱10 안에 드는 우리 회사도 3년 연속 적자로 버틸 재간이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직원 수 30~40명 되는 중견 금형업체들이 최근 들어 줄줄이 문을 닫고 있다고 전했다. 일감 감소, 공급단가 하락, 제조원가 상승이라는 3중고를 겪고 있는 뿌리산업단지의 현실이다.
'제조업 뿌리' 주물공장…절반이 문 닫았다
활력 잃은 뿌리산업단지

뿌리산업 공단은 활력을 잃은 지 오래다. 경기 안산시 반월도금사업협동조합의 1층 공동식당은 저녁 시간에도 한산하다. 반월도금단지에 있는 60여 개사 직원이 점심과 저녁 등 하루 두 끼를 해결하는 식당이다.

설필수 반월도금조합 이사장은 “예전 같으면 저녁 시간엔 식당이 꽉 차도록 북적였지만 요샌 야근 근로자가 거의 없다”며 “자동차 등 전방산업 업황이 나빠지면서 일감이 떨어진 공장들이 저녁에는 대부분 문을 닫는다”고 설명했다.

설 이사장이 운영하는 유일금속 공장 한편에는 가동을 준비 중인 니켈 도금 기계가 서 있었다. 사람 손이 필요없는 자동화 기계였다. 설 이사장은 “최저임금 인상으로 외국인 근로자 임금 부담이 커지면서 공정을 자동화하기 위해 새로 설비를 들였다”며 “자금 여력이 있어 자동화 시설을 갖출 수 있는 곳은 그나마 낫지만 그렇지 못한 영세업체들의 폐업은 시간문제”라고 전했다.

반월산단 근처 대로변에선 운반할 화물을 못 구한 5t짜리 대형 화물트럭도 자주 눈에 띄었다. 이곳에서 생산한 부품을 각지의 공장으로 이송하는 차량들이다. 대기 중이던 한 화물차 기사는 “운송사업자와 화주를 연결해주는 앱(응용프로그램)에서도 일감을 찾기가 쉽지 않다”며 “한창 일해야 할 시간에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어 마음이 조급하다”고 말했다.

산업 침체에 인건비 인상 등 가시밭길

뿌리산업 업체들의 수익성이 악화된 주요 원인은 전방산업의 불황이다. 뿌리산업 기업이 주로 부품을 공급하는 자동차산업은 최근 2~3년간 국내외 판매가 크게 줄어들고 있다. 신차 개발도 뜸해지면서 부품 주문 및 발주가 크게 감소했다. 그나마 반도체 등 전자업체는 사정이 낫지만 삼성전자를 비롯한 대기업이 베트남 등으로 생산기지를 옮기면서 금형 도금 등 공정도 현지 조달로 바꿔가려는 분위기다.

최저임금 인상, 부자재 가격 상승도 수익성 악화를 부채질했다. 경인주물공단의 평균 공장 가동률은 60%선으로 지난 2월 중소 제조업체 평균 가동률 72.4%(중소기업중앙회 조사)보다 10%포인트 이상 낮다.

용접전문기업인 한토를 운영하는 최기갑 용접공업협동조합 이사장은 “5년 전과 비교해 직원 수가 40%가량 줄었는데도 회사가 지급하는 직원 임금 총액은 똑같다”며 “그만큼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임금 상승폭이 커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부천 오정산단에서 금형업체를 운영하는 B사장은 “몰드베이스, 특수강, 공구 등 부자재 공급업체들이 대기업이다 보니 중소 금형업체의 협상력이 떨어진다”며 “부자재 가격 상승 요구에 속수무책인 상황”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사업 의지 꺾인 뿌리기업들

인력난은 고질병이다. 선박엔진 부품인 실린더라이너 제조 주물업체 광희는 1년째 사람을 구하고 있지만 여전히 10명가량 부족하다. 조영삼 광희 대표는 “채용 공고를 내도 60세 이하 내국인은 한 명도 지원하지 않는다”며 “나이 든 사람도 힘들다며 이틀이면 그만둔다”고 했다. 인력난에 허덕이다 보니 외국인 고용 쿼터에 영향을 받지 않는 아프리카 난민을 고용하는 기업도 있다.

인건비가 저렴한 동남아시아 등으로 공장을 옮기는 것도 여의치 않다.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에서 공장 이전을 예전처럼 반기지 않기 때문이다. 한 도금업체 사장은 “공장을 이전하기 위한 최소 투자금액을 올리고 단순 공정이 아닌, 첨단산업과 관련한 기업을 유치하기 때문에 해외 이전도 쉽지 않다”고 했다.

열악한 상황에 몰린 뿌리산업 기업들이 폐업 시기만 저울질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 이사장은 “좋은 날이 다시 올 것이라는 생각으로 버티던 주변 업체들이 이제는 업황 회복을 기대하지 않는다”며 “기계와 공장을 처분하기 어려워 기업을 유지할 뿐 사업 의지가 사라져가고 있다”고 전했다.

■뿌리산업

제조업의 근간을 이루는 주조(주물)·금형·소성가공·용접·표면처리(도금)·열처리 등 6개 뿌리기술을 기반으로 한 산업. ‘뿌리산업 진흥과 첨단화에 관한 법률’에 기반을 둔다. 조선 자동차 선박 등 주요 산업에 관련 부품을 제조해 공급한다.

김낙훈 중소기업전문기자/나수지/서기열 기자 n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