둑이 터진 것 같다. 혈세(血稅)로 쌓은 나라곳간을 ‘먼저 보는 게 임자’인 듯 펑펑 쓰고 있어서다. 정부·여당이 재정 퍼쓰기에 앞장서자 지방자치단체들도 덩달아 온갖 퍼주기 백일장을 벌인다. 심지어 지자체가 먼저 시작한 ‘현금 뿌리기’식 청년수당을 중앙정부가 베끼기도 한다. 야당은 말로만 ‘세금 살포’를 비난할 뿐 돌아서면 지역구 예산 챙기기에 바쁘다. 1년 뒤 총선에 올인한 정치권의 묵시적 담합이 이뤄진 듯하다.

먼저 500억원 이상 공공사업이면 의무적으로 받아야 할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예비타당성 조사(예타)부터 형해화하고 있다. 이젠 국민들도 예타 하면 ‘조사’가 아니라 ‘면제’부터 떠올릴 정도다. 올초 ‘균형발전’ 명분의 23개 사업, 24조원을 비롯해 문재인 정부 2년간 예타 면제 사업 규모만 총 54조7000억원에 이른다. 지난 정권 4년보다 두 배 이상 많다. 이명박 정부를 ‘토건·삽질 정부’라고 비난하던 이들이 맞나 싶다.

여당이 17개 시·도를 돌며 벌인 순회 예산정책협의회에서 요청받은 지역 개발사업이 134조원에 이른다고 한다. 여기에도 국비 수십조원이 들어갈 판이다. 정부는 소위 생활 사회간접자본(SOC)에도 48조원을 쏟아붓겠다고 발표했다. 조(兆)를 넘어 ‘10조’ 단위가 기본이니, 4대강 22조원이 푼돈으로 보인다.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은 “국민 호주머니는 현금자동입출금기(ATM)가 아니다”고 비난했지만 재정 축내기에서 오십보백보다. KDI 출신 유승민 바른미래당 의원이 “무분별한 예타 면제를 방지해야 한다”며 발의한 국가재정법 개정안에 여당 못지않게 반대한 게 한국당이다. 국가재정을 철저히 관리해야 할 기획재정부조차 심드렁해 법안이 폐기 직전까지 갔다고 한다. 경제성 없는 공공사업에 아무런 제동장치도 없는 꼴이다. 앞으로 ‘잃어버린 20년’의 일본처럼 전국에 ‘다람쥐 도로’나 ‘고추 말리는 공항’이 들어설 일만 남았다.

해마다 습관처럼 편성하는 추가경정예산도 밑빠진 독이 돼버렸다. ‘초(超)슈퍼 예산’을 짜놓고 봄이 가기도 전에 추경 타령이다. 작년보다 26조원 늘린 올 예산(470조원)을 40%도 못 썼고, 미세먼지 예산도 1조원 넘게 남았는데 정부는 또 미세먼지와 경제살리기를 이유로 빚 내서 7조원 안팎의 추경을 더 달라고 한다. 추경 요건에 맞는지 의문이거니와 ‘습관성 추경, 총선용 추경’이나 다름없다. 이런 판이니 신재민 사무관의 폭로, 나랏빚이 1700조원이란 경고도 아무 소용이 없다.

곳간의 빗장이 깨지면 도둑들이 들끓게 마련이다. 재정건전성이란 기본원칙을 망각한 나라들의 운명이 어떤지는 남미와 남유럽에서 숱하게 봐왔다. 툭하면 구제금융에 손 벌리는 아르헨티나, 석유 부국인데 국민 90%가 빈곤 상태인 베네수엘라, 흥청망청 재정을 탕진하다 ‘돼지’라는 오명을 쓴 ‘PIGS(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국가들의 비극이 먼 나라 얘기일까. 정치인은 사탕발림으로 이득을 보겠지만 그 대가와 고통은 고스란히 유권자에게 되돌아온다. 이제는 국가재정법을 고쳐 예타 면제 남발을 원천봉쇄하고, 추경 중독을 끊어야 한다. ‘혈세 도둑’을 막을 사람은 유권자들밖에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