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엽 논설위원
[천자 칼럼] 소수의견

“우리는 모두 태아였다.”

조용호(64)·이종석(58) 두 헌법재판관이 지난주 낙태죄 위헌 심판에서 낸 소수의견이다. “우리가 위헌·합헌 논의를 할 수 있는 것도 모두 낙태당하지 않고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합헌의 변에 고개를 끄덕인 사람이 적지 않았을 듯싶다.

헌법재판관 9명 중 7명이 낙태죄를 위헌으로 판단했지만, 6년 전만 해도 합헌이었기 때문에 논란은 더 이어질 수밖에 없다. 앞서 간통죄, 양심적 병역거부 등에 대한 법원 판단도 줄줄이 뒤집어졌다는 점에서, 세상 변하는 속도에 살짝 현기증이 날 정도다. 한편으로 법관들마저 혹시 유행을 타는 것 아닌가 하는 찜찜함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소수파와 소수의견을 삐딱하게 보는 시선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힘이 ‘마이너리티’에서 나올 때가 많다. 17세기 초 케플러가 등장하기 전까지 지동설이 소수의견이었던 것처럼, 모든 진리의 출발은 소수학설이다. 천재로 불리는 사람들의 약 70%는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다는 게 정신병리학계의 설명이기도 하다.

일류 중에 소수파를 자처하는 이도 허다하다. 《로마인 이야기》의 작가 시오노 나나미도 그런 사람이다. 일본서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에 이탈리아로 건너가 어디에도 적(籍)을 두지 않고 독학한 이력에서부터 소수파의 향기가 전해진다. 그는 “다수는 시끄러울 정도로 네거리를 활보한다”며 “사일런트 머저리티(침묵하는 다수)라는 개념은 사라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사일런트 마이너리티(조용한 소수)》라는 기발한 제목의 역사 에세이집을 펴내기도 했다.

소수를 어떻게 대접하느냐는 한 사회 건강성의 바로미터다. 소수를 배제하지 않고, 소수의견이 빈번하게 도출되며, 주류가 귀 기울이는 조직이라야 희망을 말할 수 있다. 다수의 횡포를 견제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요체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는 뒤집어 보면 소수를 억압하는 제도인 만큼 신중하게 운영돼야 한다.

소수의견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은 곧 자기자신을 보호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이 과반에 속할 때는 느끼지 못하다가, 소수가 돼서야 민주주의에 차별이 넘친다는 점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는 법이다. 민주주의 종주국 영국의 윈스턴 처칠이 “민주주의는 지금까지 시도된 모든 다른 정부 형태들을 제외한다면 최악의 제도”라고 한 이유다.

“한 사람의 바보는 한 바보, 두 사람의 바보는 두 바보, 만 사람의 바보는 역사적인 힘이다.” 시오노 나나미가 좋아한 이탈리아 저널리스트 레오 롱가네지(1905~1957)의 말이다. ‘우리는 모두 태아’였으며 ‘진리는 모두 소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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