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 논설위원
[천자 칼럼] 화폐인물 유감

국가의 첫째 상징이 국기(國旗)라면 둘째는 화폐다. 누구나 매일 쓰고 외국인도 먼저 접해 사람들에게는 더 친숙하다. 나라마다 화폐 디자인을 종합예술로 여기고, 국가 정체성과 역사·문화를 담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 이유다.

세계 화폐의 8할은 앞면에 인물이 들어간다. 주로 왕, 대통령부터 사상가, 과학자, 예술가 등 다채롭다. 미국 달러화 인물은 ‘건국의 아버지들’과 역대 대통령이다. 오바마 시절 20달러 지폐인물을 2020년부터 앤드루 잭슨 전 대통령 대신 흑인여성 인권운동가 터브먼으로 변경키로 했지만 실행 여부는 미지수다.

영국 파운드화는 앞면에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등장하지만 뒷면은 뉴턴, 애덤 스미스, 다윈, 처칠 등 남성 일색이었다. 2017년 10파운드 지폐에 사망 200주기인 여류작가 제인 오스틴을 넣어 화제가 됐다. 유로화 출범 전 프랑스의 50프랑 지폐는 생텍쥐페리와 ‘어린왕자’가 그려져 수집가들의 인기를 모았다. 또한 몽테스키외, 세잔, 드뷔시 등을 새겨 문화강국임을 과시했다. 독일도 그림형제, 클라라 슈만, 가우스 등이 화폐에 들어갔다. 반면 유로화 도안에선 다채로움이 사라졌다는 지적을 받는다.

중국은 1999년 화폐도안을 전면 개편해 모든 지폐 앞면을 마오쩌둥 초상이 독점하게 됐다. 이전 구권(舊券) 100위안에 마오와 건국주역들의 옆얼굴을 넣고, 소수민족들의 초상을 담았던 것과 대비된다. 구권 2자오(角) 지폐에는 조선족 초상도 있었다.

그제 일본 정부가 1만엔권에 시부사와 에이이치(1840~1931)를 넣는 등 지폐인물을 전면 개편한다고 발표해 논란이다. 시부사와는 제1국립은행, 도쿄증권거래소, 도쿄가스 등 수많은 기관·기업을 설립해 ‘일본 경제의 아버지’로 불린다.

일본에선 기릴 만하겠지만 우리로선 썩 유쾌하지 않다. 그가 대한제국의 근대 화폐 발행, 철도 부설, 경성전기(한국전력 전신)를 통해 경제침투에 앞장선 탓이다. 일본은 기존 지폐도 메이지시대(1868~1912) 인물이다. 중국 화폐의 마오 일색처럼 일본 지도층의 정신적 배경을 읽을 수 있다.

반면 한국의 화폐인물은 ‘조선전기에, 이(李)씨 성을 가진, 남성들’이 대다수다. 퇴계, 율곡 등 성리학자들이 대표인물인지 의문이고, 신사임당과 율곡처럼 세계 유일의 모자(母子) 화폐인물도 갸우뚱하게 한다.

논란 많은 리디노미네이션(화폐단위 절하)은 당장 어렵더라도 화폐도안은 바꿀 때가 됐다. 인물부터 다양화하고, 대한민국이 이룬 성취를 담을 필요가 있다. 먼저 위인의 공(功)보다는 과(過)를 들추고, 모든 논의가 블랙홀처럼 정치논쟁화하는 사회 분위기부터 쇄신해야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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