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엽의 논점과 관점] 누가 '노동의 적'인가
시대의 모순을 아파하고, 맞서는 이들의 삶은 경외감을 준다. 그 투쟁이 과격하고 때로 법의 경계를 넘어설지라도 따뜻한 시선만큼은 거두기 힘들다. 불면의 밤을 지새운 끝에 내린 고뇌의 선택일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서다.

한국의 노동운동을 보는 우리 시선이 그랬다. 기폭제가 된 전태일의 분신은 우리 사회의 모순에 상처 입은 스물두 살 청년 노동자의 몸부림이었다. 16세에 봉제공장 ‘시다(보조수)’로 시작한 전태일은 3년 만에 재단사가 될 정도로 전도유망했다. 월급도 10배나 치솟아 일신의 안락을 도모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매일 악전고투하는 ‘시다’들의 열악한 노동 현실에 눈감지 않았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던 39년 전 평화시장 뒷골목의 외침은 거대한 사회적 각성을 불렀고, 오늘 우리는 ‘살 만한 대한민국’을 성취해냈다.

노동 운동 욕 먹이는 민주노총

지난주 ‘4월 총력투쟁’을 결의한 민주노총은 ‘전태일의 후예’를 자처한다. 작년 초 취임한 김명환 위원장의 첫 일정도 전태일 열사 묘역 참배였다. 하지만 민주노총의 요즘 행보는 시대적 소명은커녕 오직 조직의 보위와 이익에 휘둘리는 모습이 역력하다. 100만 조합원 중 수십만 명이 ‘억대 연봉자’로 분류될 정도인데도 “더 받아야겠다”며 광장과 거리를 밥 먹듯 점령한다.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되면 하청·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급여 삭감과 대량 해고에 몰릴 개연성이 높다는 점은 안중에도 없는 비정함이다. 많은 중소·벤처·지역 노동자가 원하는 ‘탄력근로 확대’ ‘최저임금 속도 조절’ ‘광주형 일자리’를 총파업으로 저지하겠다는 독선은 ‘노동의 적’이 누구인지 되묻게 한다.

투쟁 방식은 야만이라는 단어를 연상시킨다. 사장실 문을 부수고 난입해 모욕과 폭력을 퍼붓는 식은 조직폭력배의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지방자치단체장 집무실을 점거해 떼쓰고, 국회 습격도 빈번하다. 경찰에 대한 물리력 행사가 일상이 됐고, 최고 법 집행기관인 대검찰청까지 쳐들어가 법치를 위협한다. “조합원들에게 공사를 몰아달라”며 건설 현장을 봉쇄하고 비노조·외국인 근로자의 차별을 강요하는 행태는 ‘노동 존중’이라는 구호를 스스로 희화화시켰다. 이쯤 되면 “괴물의 탄생”(김학용 국회 환경노동위원장)이라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닐 듯싶다.

선배 운동가들의 배신감 토로

국민연금 등 웬만한 국가 기구에 다 관여할 만큼 민주노총은 핵심 권력이 됐지만, 걸맞은 책임감은 찾아보기 힘들다. ‘노·사·정 대화’ 참여는 20년째 거부 중이다. 올해 네 차례의 총파업을 예고하며 주먹부터 내미는 등 일방통행은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 민주노총 출신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마저 “대화해서 뭐가 되는 곳이 아니다”며 혀를 내두르는 지경이다.

무엇보다도 민주노총에 큰 애정을 가진 선배 운동가들의 배신감 토로에서 민낯이 확인된다. 전태일의 죽음을 세상에 알린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 대표는 “망국 10적 중 제1호가 민주노총”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양극화와 청년실업의 주범”이라고도 했다. 엄혹했던 시절 ‘노동운동 대부’였던 김문수 전 경기지사는 “초법적 혁명집단으로 변질됐다”고 단언했다. ‘문전투’로 불린 문성현 경제사회노동위원장도 40년 노동운동에 헌신한 결과가 기득권 노조의 배불리기로 귀착되느냐며 자괴감을 감추지 않는다.

민노총은 “전체 노동자를 위해 악역을 맡은 것”이라지만 그 말은 약발이 다했다. 특혜 집단의 알박기이자, 불로소득을 탐하는 지대추구라는 의구심만 커갈 뿐이다. 막가는 총파업으로 ‘5% 귀족노조’의 철밥통을 키울 요량이라면 ‘인간 존엄’을 외친 전태일을 말할 자격이 없다.

kecor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