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갑영 칼럼] 우리도 브루킹스·헤리티지 같은 연구기관 세워야
문명화된 선진국일수록 학문적 연구결과와 전문가의 탁견을 존중하고, 이를 공공정책에 반영하는 문화를 갖고 있다. 오랫동안 축적된 과학적 진리와 집단지성의 합리성에서부터 국가 발전의 원동력을 찾기 때문이다.

실제 세계 어디에서도 과학성과 전문성을 도외시한 정책이 성공을 거두고, 국민을 풍요롭게 만든 역사를 찾아볼 수 없다. 행여 인기영합적인 선동이나 곡학아세(曲學阿世)의 편견으로 단기적인 성과를 거뒀던 경우에도, 결국은 엄청나게 큰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사회적 비용을 치른 경우가 수두룩하다. 지금 베네수엘라에서도 무분별한 시혜(施惠)정책이 불러온 참담한 역사가 그대로 재연되고 있지 않은가.

특히 경제나 복지 등 개인 생활에 직접 영향을 주는 공공정책은 과연 어떤 게 바람직한 ‘진리’이고, 달콤한 ‘거짓’인지를 판별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게다가 정치권이 무상복지의 당근까지 엮어 놓으면, 시민의식이 높은 유권자마저도 ‘공짜’를 쉽게 외면하기 힘들다. 정치권이 무책임한 정책을 남발해 표를 얻고 인기를 누릴수록, 국민 경제의 잠재역량은 빠른 속도로 훼손되기 마련이다. 이런 이유로 중진국의 문턱을 넘자마자 좌절한 국가가 한둘이 아니다. 이제 막 국민소득 3만달러에 진입한 우리도 지금 이런 유혹으로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한국 경제가 이 장벽을 넘어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국가의 정책 결정 패러다임에 대전환이 필요하다. 우선 여야가 모두 폐쇄적인 ‘캠프’를 중심으로, 전문성보다도 정치성이 강한 우호단체를 앞세워 여론몰이로 정책을 결정하는 행태에서 탈피해야 한다.

이제는 선진화된 문명국에 걸맞게 전문화된 집단지성을 체계적으로 활용해, 국가의 장기비전과 전략을 개발하는 독립적 싱크탱크를 상설 운영해야 한다. 정당의 이념과 목표를 담은 정책을 제시하고, 국민에게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보여줘야만 한다.

장기적인 청사진도 없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몇몇 캠프의 독단으로 교육, 에너지 등 국가의 백년대계마저도 조령모개(朝令暮改)한다면, 어떻게 국가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국민은 이런 비문명의 정치문화에 너무 지쳐 있고, 국가는 한 발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이미 1916년에 국가의 공공정책을 연구하는 브루킹스연구소가 설립돼 민주주의와 국민후생의 확대, 국제 간의 개방적 협력을 표방하며 진보 성향인 민주당의 정책 산실이 돼 왔다. 대공황 위기에 루스벨트의 정책 개발에 참여한 이래 경제와 정치, 외교 안보 등에서 미국 최고의 민간 연구소로 평가받고 있다. 보수성향의 헤리티지재단은 이보다 늦게 1973년에 설립돼 작은 정부와 자유 시장경제를 표방하는 대표적 정책연구기관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헤리티지의 국가전략을 대대적으로 채택한 이래 지금까지 공화당의 정책을 주도하는 싱크탱크가 돼 왔다. 두 연구소 모두 독지가와 일반인들의 기부에 의해 운영되며 1년 예산이 무려 1억달러에 이른다. 물론 다른 선진국에서도 국가의 비전과 이념, 전략을 제시하는 민간의 독립적 연구기관이 운영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독립적 연구기관은커녕 대학 등에 흩어져 있는 전문가마저도 이념이나 캠프에 밀려 소외되고 있다. 국책 연구소는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흔들리고, 민간 연구소 역시 정부의 서슬에 눌려 제대로 말 한마디 못한다. 학계에서도 정책토론의 장(場)이 사라진 지 오래고, 오로지 여야 대변인의 정치적 입씨름만 난무할 따름이다. 경제정책에서부터 탈원전과 보(洑)의 해체, 교육과 복지 등 주요 공공정책의 결정 과정에 당대의 주류를 이루는 집단지성의 과학적 논리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케인스의 경고처럼 과학성과 전문성을 간과하고 정치적 이념에만 매몰된 정책은 자칫 수백만 명을 궁핍하게 만드는 비극을 초래할 수 있다. 정치권력이 학문적 기반이 취약한 정책으로 국민을 실험하는 만용을 부린다면, 그 폐해는 누구에게 돌아가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