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의 ‘과거사 회귀’가 점입가경이다. 굴곡진 근현대사를 정치 도구로 삼고 쟁점으로 부각시키는 ‘역사의 정치화’가 도를 넘어섰다. 3·1운동 100주년에 부응한 정부의 반일(反日) 기조와 일본 내 혐한(嫌韓) 기류까지 맞물려 기름을 붓는 형국이다. 악화일로인 한·일 관계의 골을 더욱 깊게 파고, 나아가 온갖 과거 역사까지 죄다 들춰낼 움직임이다.

이런 행태는 여당이 압도적 다수인 시·도의회들이 앞장서고 있다. 최근 경기도의회 의원 27명은 ‘일본 전범(戰犯)기업 제품 표시에 관한 조례안’을 발의했다. 도내 4700여 개 초·중·고교의 일본산 비품(20만원 이상)에 ‘일본 전범기업이 생산한 제품입니다’라는 스티커 부착을 의무화하는 내용이다. 서울시의회에도 시·교육청·의회 및 산하기관이 ‘전범기업’과 수의계약을 못 하게 하는 조례안이 발의돼 있다.

설상가상 6·25와 조선시대까지 소환하고 있다. 인천시의회는 인천상륙작전 때 유엔군 공습으로 피해를 입은 월미도 원주민에게 생활안정 지원금을 주는 조례를 지난 15일 통과시켰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해 9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를 발족시켜 유족 등록업무를 벌이고 있다. 120여 년 전 사건까지 끌어와 “이러다간 임진왜란 피해보상 얘기까지 나오겠다”는 네티즌의 비판이 나온다.

고난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기억하고 되새기는 건 필요하다. 하지만 진보성향 학자인 최장집 고려대 교수도 지적했듯, 정치인들이 앞장서 ‘관제(官製) 민족주의’로 치닫고 보여주기식 이벤트로 몰고가는 데는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반일이든 극일(克日)이든 실력을 키울 생각은 않고, 감정적 대응에 치중하는 건 국익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국내에서 ‘관제 불매운동’을 거론할 때 일본에선 민간에서 자발적인 한국산 불매운동이 고개를 든다. 심지어 ‘한국과 단교, 무역보복, 비자발급 중단’ 등 적대국에나 할 법한 소리까지 나온다. 우리 산업의 경쟁력은 일본의 정밀부품, 핵심장비가 없어도 무방한 수준이 못 된다. 더구나 지난해 754만 명의 한국인이 일본을 찾고, 양국 교역액이 852억달러에 이른다. 글로벌 시대를 살아갈 젊은 세대에게 배타성과 폐쇄성을 각인시키는 것은 시대착오다.

이낙연 총리는 지난 1월 “일본 정치인들이 국내 정치를 위해 반한 감정을 자극한다”고 했지만 이 말은 거꾸로 한국 정치인들에게도 해당된다. 국민 관심을 ‘과거’로 끌고가 자신들은 정치적 이득을 얻을지 몰라도, 그 대가는 온 국민과 일본에 나간 청년, 기업, 동포가 치러야 한다. 가뜩이나 경제 앞날이 어둡고 취업난에 좌절하는 청년들에게 과거로만 달려가는 정치는 범죄나 다름없다. 정치의 진정한 본분은 젊은 세대를 위해 ‘미래’를 열어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