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 칼럼] 경제에 임계점이 다가오고 있다
권투 경기에서 회심의 훅이나 스트레이트는 상대를 쓰러뜨린다. 그러나 한 방에 경기가 끝나는 경우는 드물다. 네 번 쓰러진 홍수환의 역전 KO승도 그래서 가능했다. KO 확률이 높은 것은 오히려 잽이 누적될 때다. 가볍게 던지는 잽은 가랑비에 옷 젖듯 상대를 무너뜨린다. 앞으로 고꾸라지면 다시 못 일어난다.

외환위기, 금융위기는 일발필도였지만 제조업의 강한 회복탄력성 덕에 벌떡 일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라 안팎에서 날아드는 무수한 잽에 서서히 무너져내리고 있다. 산업마다 성한 곳이 없고, 자영업은 벼랑 끝이다. 유일한 버팀목인 수출마저 두 자릿수 감소세다. ‘세금 알바’ 외에는 일자리도, 일감도 안 보인다. 청년들은 한숨과 좌절 속에서 분노한다. ‘잃어버린 20년’의 일본도 이랬을까.

지난달에 1주일간 경기 평택항부터 전남 영광, 부산, 경북 포항, 강원 고성까지 해안선을 따라 2400㎞를 돌아본 한 교수의 소회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말이 아닙디다. 멈춰선 공장, 문 닫은 해변가 식당, 배가 두 척뿐인 부산신항…. 가슴이 먹먹합니다.”

앞날도 어둡기는 마찬가지다. 승차공유, 빅데이터, 자율주행차, 원격의료 등 새로운 건 다 막혀 있다. 세계가 앞다퉈 뛰는데 홀로 역주행이다. 4년 시한부인 규제 샌드박스도 차기 정권에서 어떤 운명일지 알 수 없다. 녹색성장, 창조경제도 그랬다. 규제는 소극행정을 엄벌한다는 으름장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성장이 멈춘 사회’는 서있는 모든 자리가 기득권이다.

‘각자도생의 시대’에 모두가 열심히 노를 젓고는 있다. 그런데 어디를 향해 가는지 모른다. 리더십의 방향타가 고장난 탓이다. 국민 시선은 미래, 자식세대, 은퇴 뒤를 향해 있는데 정치 시계(視界)는 과거와 다음 선거뿐이다. 그러니 국제통화기금(IMF)이 ‘단기·중기 역풍(headwind)’을 걱정하고 노동시장 ‘유연안정성(flexicurity)’과 진입장벽 완화를 충고해줘도 추경 권고만 들리는 모양이다.

많은 지식인이 “경제가 총체적으로 가라앉고 있다”고 우려한다. 생산인구가 감소하면 기술, 법·제도, 혁신 등에서 국가차원의 ‘실력’을 키우는 게 급선무다. 그런 실력을 보여주는 총요소생산성 저하가 위기의 본질이다. 조세재정연구원에 따르면 2001~2005년 0.83%, 2006~2010년 1.08%이던 총요소생산성 증가율이 2011~2016년은 -0.07%로 급전직하했다.

소득주도 성장을 신앙처럼 섬기는 문재인 정부에서 이를 반전시킬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선형(線型)으로 움직이는 경제를 마디마디 잘라 분절형(分節型)으로 접근하고 심지어 모순되기까지 해서다. 혁신성장을 내걸고 비용 상승(소주성)을 유발하고, 투자 활성화를 요구하면서 투자 발목을 잡고, 탈(脫)원전을 밀어붙이면서 원전 세일즈를 하는 식이다.

한국은 위기 예방은 못 해도 극복은 잘하는 나라였다. 모건스탠리의 루치르 샤르마 신흥시장 총괄사장은 “50년간 연평균 5% 이상 성장한 나라는 세계에서 한국과 대만뿐(‘브레이크아웃 네이션스’)”이고 “제조업이 강한 나라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애프터 크라이시스’)”고 했다. 그러나 과거 얘기일 뿐이다.

대기업조차 실적 악화를 넘어 성장 한계에 봉착했고, 중견·중소기업은 매물이 산더미다. 게다가 북핵 덫에 걸린 외톨이 외교, 민심에 흔들리는 사법까지 또 다른 불확실성으로 다가온다. 노동계는 촛불정권의 채권자로서 책임은 없이 권리만 요구한다. 마치 모래에 꽂은 막대(경제)가 쓰러질 때까지 조금씩 모래를 빼가는 놀이를 하는 듯하다.

물리 세계뿐 아니라 경제에도 급격한 추락의 임계점(臨界點·critical point)이 있다. 물이 넘치는 건 마지막 한 방울이고, 바위가 굴러내리는 건 떠받치는 작은 돌멩이 하나가 빠질 때다. 기업인들은 본능적으로 임계점이 가까워졌음을 느낀다. 버티고 버티다 손을 놔버리는 것도 한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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