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한·미동맹 66년의 가치
한·미 관계의 핵심은 동맹이다. 한·미 동맹관계는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이후 군사동맹으로만 66년이 된다. 군사동맹이 시작된 이유는 6·25전쟁 후 북한의 재남침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내고자 함이었다. 국제정치학자 니컬러스 스파이크먼은 “국가란 스스로 강력하든지, 아니면 자신을 보호해주는 강력한 국가가 있어야만 생존 가능하다”고 했다. 한국이 북한과 중국 등 주변국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낼 군사력을 갖추지 못했다면 ‘보호해줄 수 있는 강력한 국가’를 이용해 생존의 길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취지에서 보면 한·미 동맹 66년은 우리의 번영과 안전을 위해 동맹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해준 기간이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 들어 북한과 더 가까워지고 중국과 더 친해지려고 하면서 한·미 동맹이 흔들리고 있다. 집권세력이 ‘평화’에 도취해 ‘동맹’의 중요함을 잊는 상황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등장으로 한·미 관계는 ‘동맹’의 가치보다 ‘경제적 손익’이 강조되는 현실이 돼 버렸다. 정부는 남북한 관계를 좋게 가져가고자, 미국은 경제적 이유 때문에 한·미 연합훈련을 중단시키는 등 군사동맹이 형해화하는 중이다. 종전선언이 이뤄지면 유엔사 해체와 함께 그 주력 부대인 미군의 철수도 우려된다. 북한이 대남전략으로 그토록 달성하고자 하는 ‘일제강점기를 지나 미제강점에 신음하고 있는 남조선’의 해방을 맞이하는 순간이 코앞에 다가와 있는 형국이다. 이 때문에 이젠 담담하게 한국의 번영과 안전을 담보해온 한·미 동맹의 역할을 돌이켜보며 한·미, 한·중 관계의 미래를 가늠하고 선택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돌이켜보면 미국이라는 동맹은 우리에게 자유시장경제의 틀을 만들어줬고 결정적인 고비마다 ‘친구’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1948년 제헌헌법이 갖고 있던 민족사회주의 또는 국가자본주의 통제경제적 성격의 조항들을 고쳐 사기업에 근거한 자유시장경제로 나가게 한 배경에는 미국의 설득이 있었다. 미국은 1948년 경제협력법을 제정하며 ‘마셜 플랜’이라고 부르는 서유럽 원조 제공과 함께 한국에도 1억1650만달러의 원조를 제공했다. 이를 위한 한·미 협정 체결을 위해 양국은 협상을 시작했고, 이때 미국은 우리의 제헌헌법이 지향하고 있는 국가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외국 기업들의 투자가 힘들다는 이유를 들어 국가통제 조항의 개정을 지도했다.

그래서 제헌헌법 87조의 ‘중요한 운수, 통신, 금융, 보험, 전기, 수리, 수도, 가스 및 공공성을 지닌 기업을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한다’는 부분이 사라졌고, 제88조는 ‘국방상 또는…법률로써 특히 규정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영기업을 국유 또는 공유로 이전하거나 그 경영을 통제 또는 관리할 수 없다’로 바뀌었다. 이런 1954년 11월의 헌법 개정으로 대한민국에 사기업의 토대가 확립됐고 제헌헌법이 지향했던 국가자본주의 체제는 해체됐다. 한국 경제가 자유시장경제 체제 위에 서게 되는 근본적 변화 또는 ‘경제 혁명’이 미국이라는 동맹이 있어 가능했다는 의미다.

또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친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1960년대 독일로 광부와 간호사들을 파견할 수 있었던 것도 미국이란 동맹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과거사위원회의 보고서는 “한국 광부의 독일 파견은 … 1961년 초 미국대외원조기관(USOM)의 중개를 통해서였다. 이 기관은 … 한국 광부의 고용을 독일 정부에 적극적으로 추천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렇게 한·미 동맹은 한국의 번영을 담보하는 발판을 제공했고 6·25전쟁에서 한국을 지킨 생명의 안전판이 됐다. 이것을 냉전체제에서 미국의 패권(Pax Americana)을 유지하기 위한 전략으로 치부하는 일부의 주장은 자유진영 보호를 위한 미국의 ‘관대한 희생’은 보지 않으려는 편협한 시각일 뿐이다. 현 집권세력의 일부는 친중(親中)을 표방하며 중국 주도 체제로의 편입을 고려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과거 조공(朝貢) 관계의 재현은 시대착오적이다.

정치란 국가의 미래를 위한 결정이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군주론》 23장에서, 역사로부터 배우는 군주의 ‘현명함’을 강조했다. 문재인 정부가 한·미 동맹 66년의 역사로부터 그 소중한 가치를 깨닫는 명민(明敏)함을 보여줄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