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의 맥] 규제 샌드박스, 21세기 신해통공
조선 전기에는 중농억상(重農抑商)이 경제정책의 기조였다. 상업 활동을 국가의 허가를 받은 ‘시전(市廛) 상인’에게만 허락했다. 이들에게 금난전권(禁亂廛權)을 줘 허가 없이 장사하는 난전을 단속하게 했다. 시장의 혼란을 막고 백성이 농업에 전념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농업 생산력이 높아지고 수공업이 발전하면서 상품 유통과 화폐경제가 빠르게 퍼져나갔다. 결국 금난전권의 순수한 의도는 퇴색했다.

시전 상인이 백성의 소소한 경제활동까지 막으며 불합리한 잣대로 난전을 단속하고 시장을 독점하면서 물건 값이 폭등했다. 그들이 독점하는 시장은 급증하는 사회적인 부와 상품에 대한 수요를 더 이상 충족시키지 못했다. 부작용을 타개하려 조선 22대 정조대왕은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상인의 금난전권을 폐지했다. 모든 백성에게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허락하는 신해통공(辛亥通共)을 시행했다. 그 결과 시장의 경쟁이 활발해져 상품의 품질이 개선되고 백성의 소비도 증가했다. 신해통공 정책은 조선 상업 발전의 한 획을 그은 계기로 평가받고 있다.

글로벌 기술 속도전 시대를 사는 우리는 정조대왕의 과감하고 시의적절한 개혁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이 순간에도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신기술이 계속 나타나고, 새로운 분야의 산업도 성장하고 있다. 시대와 환경이 변하면 이를 둘러싼 규칙도 새롭게 정비해야 한다. 세계적인 추세에 맞고 국민의 삶을 편리하고 풍요롭게 하는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라면 관련 규제를 풀어서 빠르게 시장에 진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 경제가 지속 성장할 것이다. 그런 고민에서 출발해 정부가 올 2월부터 시행한 제도가 ‘규제 샌드박스’다.

변화는 고통을 수반한다. 새로운 제도에 대한 우려와 기존 제도에 대한 미련과 집착은 이해관계자 간 갈등을 일으킨다. 그러기에 충분한 검토와 논의가 필요하다. 정조대왕은 권력에 기대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기보다 남인과 노론 사이의 토론 과정을 거쳐 신해통공 정책을 만들었다. 기존의 법과 제도에 근거한 규제를 푸는 것은 경제·사회적인 가치에 영향을 미치고 다양한 이해관계의 조정을 필요로 한다.

정부는 이런 역할을 하는 기구로 ‘규제특례심의위원회’를 신설했다. 정부 위원뿐만 아니라 규제 관련 민간 전문가도 참여하는 위원회는 경제적인 가치뿐만 아니라 국민의 생명·안전·환경도 고려해 치열하게 논의한다. 필요하다면 안전장치를 마련해 특례를 준다. 지금까지 두 차례에 걸쳐 산업융합 분야에서만 9건의 규제특례를 부여했다. 정부는 규제 샌드박스가 앞으로 더 많은 기업에 시장진출 기회를 주고 성과를 내도록 돕는 정책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예정이다.

법제도의 해석과 운용에 소극적인 정부의 자세를 규제 샌드박스를 통해 적극적인 자세로 바로잡아 나가고자 한다. 일례로 제2차 산업융합 분야 규제특례심의위원회는 의료기기로 허가받아 일부 의료기관에서 사용 중인 자동산소공급장치에 대해 논의했다. 현행 규정에 따르면 산소통에 들어있는 산소는 의약품으로 인정받지만 산소공급장치가 만드는 산소는 의약품으로 인정받지 못해 그 활용이 미미했다. 둘 사이에 기능적인 차이가 없어 불합리하다는 전문가들의 견해에도 말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식품의약품안전처, 보건복지부 등 관련 기관과 협의 후 위원회 심의를 거쳐 이 제품에 정식허가를 주기로 했다. 이미 존재했지만 거의 적용하지 않았던 ‘의약품·의료기기 복합제품’ 제도를 통해서다. 기존 제도를 적극 활용해 규제애로를 해소한 사례다. 아울러 심의과정에서 도출된 불합리한 제도는 조속히 개선하고 신기술에 대한 기준도 마련해 특례를 받지 못한 기업도 규제혁신의 효과를 누리도록 할 계획이다.

규제 샌드박스는 규제 체계의 대전환을 위한 정부의 야심작이다. 규제 혁신에도 속도를 낸다면 우리 산업과 경제의 혁신성장에도 봄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