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포럼] 무주공산화(無主空山化) 우려되는 한국식 연금자본주의
바야흐로 주총 시즌이다. 소수를 제외하고 상장기업은 2, 3월에 주주총회를 연다. 이사와 감사의 선임부터 재무제표 승인까지 상법상 가장 중요한 안건을 결정한다. 그런데 과거는 물론 지금도 주총은 거의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요식행위에 불과하다.

우선 대주주가 대부분 안정적인 지분을 소유하고 있고, 단타 위주의 소액주주들은 주주총회에 관심이 없다. 게다가 지분도 많고 장기투자를 하는 국민연금과 기관투자가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소위 ‘침묵의 파트너(silent partner)’로서 대주주의 결정을 지지해주는 것이 관례다. 대주주가 싫으면 팔고 떠나면 그만이지 속사정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과객’인 투자가가 시비를 걸어봤자 ‘득템’(?)할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미국 같은 선진국의 경우 역사가 긴 기업들은 상속세로 인해 대주주가 신탁기금, 연금 등 기관투자가로 바뀐 속칭 ‘연금자본주의’가 자리잡았다. 그래서 기관투자가가 자기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외이사를 선출해 최고경영자(CEO)를 견제하고 경영을 감시한다. 당연히 주주들의 최우선 관심사는 회사 이익과 주가다. 여기에 CEO의 운명이 달려있다. CEO가 임명한 사외이사도 회사이익이 나빠지면 냉정하게 CEO 해임에 찬성한다. 실적이 저조하면 심지어 창업주가 쫓겨나는 경우도 있다. 스티브 잡스도 한때 애플에서 잘렸다가 회사가 어려워지자 구원투수로 복귀했다.

그래서 CEO는 이익과 주가에 목숨을 건다. 이렇게 단기성과에 올인하는 기업문화가 장기가치를 훼손한다는 비판도 있지만, 미국 기업들이 여전히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 걸 보면 ‘돈 잘 버는 경영이 장땡’이라는 단순 명료한 원칙이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최고의 법칙인 것 같다.

한국도 1919년 경성방직 설립을 기준으로 보면 근대적 자본주의가 올해로 100년을 맞는다. 해방 이후를 따져도 벌써 창업주의 2, 3세에서 4세까지 등장했다. 상속세를 제대로 냈더라면 지금쯤은 미국처럼 기관투자가들이 대주주가 됐을 것이지만, 주지하다시피 지난 70년의 우리 경제 상황은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나 빨리 잘살고 보자’에 방점을 뒀었기 때문에 웬만한 ‘거시기’는 적당히 양해됐다.

하지만 이젠 1인당 국내총생산(GDP) 3만달러의 선진국이 됐고, 상장주식의 34%를 외국인이 보유하는 글로벌화 시대에 세계적 수준의 기준과 원칙을 지키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스튜어드십코드와 상관없이 기관투자가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도 대주주의 탈법과 위법에 대해 시정을 요구해야 한다. 무엇보다 현행 최고 상속세율 65%하에서는 한두 세대만 지나가면 국민연금을 비롯한 보험회사와 은행 또는 자산운용회사 등 각종 기관투자가가 웬만한 기업의 대주주가 되는 연금자본주의 시대가 온다.

그렇지만 미국의 기관투자가와 같은 오래된 경험과 전문 지식이 부족한 한국의 기관투자가가 기업 이익과 주주의 이익을 동시에 살피는 ‘윈윈’ 구조를 만들 수 있을지 걱정이다. 특히 펀드매니저의 잦은 교체와 프로정신의 부족은 연금자본주의의 가장 큰 걸림돌이다. 설사 전문적인 외부위원회의 자문을 받는다 하더라도 우리 문화에서는 거의 면피용(?)으로 변질될 소지가 크다. 여기에 당국의 훈수(?)까지 더해지면 모든 기업의 ‘무책임한 무주공산화’로 공멸의 길을 걸을 수 있다. 그래서 CEO에게 모든 권한을 주되 이익과 주가로 판단하는 미국식 기업 감시가 가장 공정하고 시비가 없는 방식일지 모른다.

이제 연금(기관)자본주의는 필연적이다. 그래서 정말 큰 일이다. 평생 돈을 벌 궁리만 하는 주인이 있다고 하더라도 기업은 항상 잘못될 수 있는 법이다. 그런데 주인이 사라지고 수익률에 급급한 펀드매니저가 대주주가 되고, ‘먹튀’ 외국인 투자가들이 호시탐탐 노린다. 시간이 없다. 사계의 전문가들이 우리 기업의 살길을 진지하게 모색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