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탑골공원과 백탑파
저 탑은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을까. 조선 세조 13년(1467)에 완공됐으니 550년이 넘었다. 키 12m의 늘씬한 몸매에 용모가 수려하다. 피부색도 하얗다. 우리나라에 드문 대리석을 썼기 때문이다. 이름은 원각사(圓覺寺) 터에 있는 10층 돌탑이라는 뜻의 ‘원각사지 십층석탑’이다.

탑은 오랜 세월 눈비를 맞으며 역사의 부침을 지켜보았다. 1504년 연산군이 원각사를 개조해 기생집으로 바꾸고, 얼마 뒤 중종이 건물을 없애버린 뒤로는 홀로 공터를 지켰다. 그러다 고종 34년인 1897년 영국인 고문의 주도로 공원이 조성되면서 다시 주목을 받았다. 한때 ‘탑동(塔洞)공원’ ‘파고다(Pagoda·탑)공원’으로 불리던 공원 명칭은 1992년 사적(史蹟) 지정과 함께 탑골공원으로 바뀌었다.

1919년 3·1운동 때는 만세운동 참가자들이 이곳으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공원 내 팔각정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자 학생과 시민들이 목청껏 만세를 외쳤다. 300여m 떨어진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이 일본 경찰에 체포될 즈음에는 시위 군중이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다. 이들이 종로통으로 물밀듯 진격하는 장면을 탑은 말 없이 내려다보았다.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이 또 있다. 1760년대 이곳 주변에 살던 ‘백탑파(白塔派)’ 문인들의 표정이다. 서얼 출신인 이들은 과거시험마저 보지 못하는 설움을 다독이며 밤낮으로 탑 주변을 맴돌았다.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맹자》와 《춘추좌씨전》을 팔아 허기를 채우기도 했다. 겨울밤 탑을 이정표 삼아 서로의 집을 오가는 모습이 무척 쓸쓸해 보였다.

이들의 한과 슬픔은 시로 승화됐고 중국에 곧 알려졌다. 1777년 이덕무·박제가·유득공 등이 엮은 시집이 중국에서 출간돼 호평을 받자 조선에서도 대접이 달라졌다. 요즘 같으면 해외에서 한류 스타가 돼 국내 무대까지 평정한 것이다. 이들 3명은 1779년 정조의 발탁으로 규장각 초대 검서관에 특채됐다.

백탑파에는 연암 박지원을 비롯해 홍대용 박제가 등 쟁쟁한 인물들이 포함돼 있다. 중국을 방문해 선진 문물에 눈을 뜬 이들은 “백성이 풍족해질 수 있다면 ‘오랑캐(청나라) 문물’이라도 적극 도입하자”며 북학(北學)을 주창했다. 사농공상의 낡은 성리학 이념에서 벗어나 통상무역 등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학정신으로 새 세상을 열자고 했다.

이들의 꿈은 정조의 갑작스러운 승하와 이에 따른 정세 급변으로 이뤄지지 못했다. 하지만 남다른 시각으로 시대를 앞서가고자 했던 이들의 혁신 정신은 오늘날 우리 경제의 성장 밑거름이 됐다. 100년 전 3·1운동이 광복의 씨앗을 잉태한 것과 닮았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본 탑에 미래의 우리 모습은 어떻게 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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