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통상임금 소송에서 연이어 노동조합 손을 들어주면서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이 무력화되는 모습이다. 수당 추가지급을 요구하는 노조에 대해 “신의칙 위반이 아니다”는 대법원과 서울고등법원 판결이 10여 일 새 잇따라 나온 것이다. ‘회사가 망할 정도가 아니라면 지급해야 한다’는 식이어서 기업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신의칙은 ‘형평에 어긋나거나 신뢰를 저버리는 내용·방법으로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는 민법의 대원칙이다. 대법원(시영운수)과 서울고법(기아자동차)은 이전 단체협약의 합의를 부정하고, 추가수당을 요구한 노조의 행태가 신의를 저버린 행동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30여 년 전에 제시된 정부의 ‘통상임금 산정지침’을 노사가 강제기준으로 인식하고 맺은 협약은 그 자체로 신뢰의 약속이었다는 점을 부인한 것이다. 관행과 제도가 바뀌었다고 해서 예전의 자율 협상까지 무효라는 판결에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다.

‘경영상 중대위험’에 대한 법원 판단도 갈수록 노조 측으로 기울고 있다. 대법원은 2013년 첫 ‘통상임금 신의칙 판결’에서 “소급분 지급시 경영에 중대한 어려움이 예상된다면 신의칙 위반”이라고 했다. ‘경영상 중대한 어려움’ 판단요건으로는 △추가인상률이 교섭 당시 인상률을 크게 웃돌고 △순이익 대부분을 추가지급할 경우 등을 제시했는데, 최근 판결은 이런 기준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시영운수 건의 통상임금 상승률은 29.1%로 기존 인상률(3.5%)의 8배다. 추가 지출액 역시 최근 3년 순이익의 623%에 달한다. 1조원 안팎의 거액 소송가액이 걸린 기아차 재판부는 난데없이 매출이 큰 점을 ‘신의칙 배척’의 한 근거로 제시하기도 했다.

최근 법원의 판결은 임금협상을 둘러싼 복잡한 제반 사정을 무시하는 듯하다. 따지고 보면 단체협약이야말로 노사 간 최고의 신뢰 계약이다. 노사협약을 손바닥 뒤집듯 번복하는 잇단 ‘친노조’ 판결은 그나마 남아있는 노사 신뢰마저 허물어뜨리는 역효과를 부를 것이다. ‘경영상 중대한 위험’의 유무를 법원이 판단하는 것 역시 능력 밖의 일이다.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