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명저] "代를 이어 살 만한 곳은 상업이 왕성한 곳"
“조선 후기 최고 베스트셀러를 꼽는다면 단연 《택리지(擇里志)》다. 사대부치고 이 책을 읽지 않은 자가 없을 정도였다.”(육당 최남선)

조선 영조 때 실학자인 이중환(1691~1756)이 1751년 출간한 《택리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문지리서로 평가받는다. 이 책은 군현(郡縣) 등 행정구역 중심인 기존 지리서와 달리 전국을 생활권 위주로 서술했다. 당시의 경제, 교통, 인심 등 사회상은 물론 지역 역사와 전설도 촘촘하게 기록했다.

이중환이 30여 년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며 채집한 생생한 정보는 다양하게 활용됐다. 산수 유람가에게는 여행 가이드북으로, 상인에게는 특산물 안내서와 물류 지침서로, 풍수 연구가에게는 지세(地勢)의 길흉을 판단하는 참고서로 사용됐다.

공간에 인문학을 담은 지리서

[다시 읽는 명저] "代를 이어 살 만한 곳은 상업이 왕성한 곳"
《택리지》의 발간 당시 제목은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을 뜻하는 《사대부가거처(士大夫可居處)》였다. 워낙 책의 인기가 높아 사대부들이 다투어 필사하는 바람에 이본(異本)이 200여 종이나 존재한다. 이중환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내용을 일부 수정하고 《택리지》로 제목을 바꿨지만 원본은 전하지 않는다. 해방 이후 번역된 《택리지》는 조선광문회가 1912년 펴낸 최남선 편집본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

이중환의 가장 큰 관심은 문화적 교양을 지닌 사대부가 살아가기에 가장 좋은 지역이 어디인가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책 구성도 여기에 맞춰 네 분야로 나눴다. 사농공상의 유래를 설명한 ‘사민총론(四民總論)’, 조선 8도의 인문지리적 환경을 설명한 ‘팔도총론(八道總論)’, 살기 좋은 지역의 기준을 논한 ‘복거총론(卜居總論)’, 입지 보완책을 담은 ‘총론(總論)’ 등이다.

“원래 사농공상의 구분은 직업상 차이에 불과했다. 학문이 발달하고 세상이 복잡해지면서 직업 차이가 신분 차이로 변하게 된 것이다. 나라가 잘 돌아가려면 사대부들이 백성과 그들의 생업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팔도총론과 복거총론은 《택리지》의 핵심 내용을 담고 있다. 이중환은 팔도총론에서 조선의 지리를 논하고 지역성(性)과 출신 인물들에 대해 서술했다. 그가 비교적 우호적으로 본 영남도 지역별로 평가가 상이했다.

“낙동강 동쪽인 경상좌도(左道)는 땅이 메마르고 백성이 가난하다. 하지만 군색하게 살아도 문학하는 선비가 많다. 퇴계 이황과 서애 류성룡의 고향인 안동 등이 여기에 속한다. 경상우도(右道)는 땅이 기름지고 백성이 부유하나 호사하기를 좋아하고 게을러서 문학에 힘쓰지 않는 까닭에 훌륭한 사람이 적다.”

복거총론은 살 만한 곳의 조건을 지리(地理), 생리(生理), 인심(人心), 산수(山水)의 네 가지를 들어서 설명한다. 지리는 하천과 산의 형상, 생리는 경제적인 입지, 인심은 지역 민심과 풍속, 산수는 경치와 풍광을 의미한다. 이 중 이중환이 가장 중시한 것은 생리였다. 생리를 논한 부분에서 이중환의 중상주의(重商主義)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사대부가 세상을 사는 동안 산 사람을 기르고, 죽은 자를 보내는 데 재물에 의지해야 한다. 재물은 하늘이 내리거나 땅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대부는 관혼상제 예절을 지키기 위해 생업을 가져야 한다. 농업보다 가문과 지역을 더 살찌우는 상업에 대한 편견을 버려야 한다. 상업 활동 중에서는 국제무역이 으뜸이다. 더 많은 국부를 창출해 내려면 국제무역을 활성화시켜야 한다.”

이중환은 사대부들이 당시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던 전남 영광 법성포, 충남 예산 유궁포, 충남 논산 강경포구 등 한강, 낙동강, 예성강, 금강 주변 지역 등을 ‘새로운 살기 좋은 곳’으로 발굴했다. 모두 물류 중심지라는 게 특징이다. 이들 지역은 《택리지》 출간 이전에는 존재감이 거의 없던 곳이었다. 오늘날에는 지역 경제 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도시 키우려면 국제무역 활성화해야"

“산수와 인심, 그리고 학품이 뛰어난 곳보다 상업이 활성화된 곳이 살기가 좋고 발전 가능성도 높다. 시장이 가깝고 강과 바다를 통해 각종 물산이 유입돼 인심이 넉넉하다. 대(代)를 이어 살 만한 곳들이다. 이처럼 먹고사는 게 풍족해야 인심도 후해진다. 도시를 키우려면 포구를 중심으로 국제무역을 활성화하고, 내륙 교통요지를 중심으로 물산 유통을 촉진해야 한다.”

이중환은 입지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입지가 모든 것을 좌우한다’는 입지결정론자는 아니었다.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은 대개 지리와 인심이 좋으며 물산이 풍부한 곳이다. 하지만 《택리지》를 제대로 활용하려면 문자 밖에서 참뜻을 구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살 만한 땅을 만들려면 그 땅에서 사는 사람들이 어떤 꿈을 꾸느냐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택리지》는 출간된 지 약 270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지역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지리서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해방 이후 근대화와 대규모 국토 개발을 거치면서 전국 지형이 격변했지만 도시 입지, 역사, 문화는 크게 달라진 게 없기 때문이다. 최근 번역서를 찾아보기 어려운 다른 고전과 달리 《택리지》 번역서들은 지금도 2~3년 주기로 꾸준히 출간되고 있다.

김태철 논설위원 synerg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