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 칼럼] 저성장을 당연시하지 말라
4차 산업혁명을 이끄는 인공지능(AI) 투자 붐이 일고 있지만, 글로벌 경제 전망은 거꾸로 가는 추세다. 세계 경기가 하강 국면에 진입할 것이란 우려가 그렇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세계 경기 고점을 2017년으로 앞당겼고, 세계은행(WB)은 세계 잠재성장률이 2013~2017년 2.5%에서 2018~2027년 2.3%로 떨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경제 전망에는 그럴 만한 이유들이 따라붙지만, 4차 산업혁명으로 기대된다는 높은 생산성 효과는 다 어디로 간 것이냐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다른 나라는 그렇다 쳐도 AI 등에서 앞서가는 미국마저 경기둔화 우려가 나오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경제학자 로버트 솔로가 1980년대 컴퓨터 혁명 속에서 제기했던 ‘생산성 패러독스’가 AI 시대에도 재현되는 것 아니냐는 가설이 나올 만한 상황이다.

에릭 브리뇰프슨 등 일단의 학자들은 그 점에 주목했다. 솔로가 컴퓨터 확산에도 불구하고 생산성 증대 효과가 통계적으로 관측되지 않는다고 했던 것처럼, 이들 역시 ‘기대와 통계의 충돌’이란 관점에서 ‘AI와 생산성 패러독스’ 문제를 제기했다. AI에 대한 기대가 높지만 현재의 생산성 통계로는 그 효과를 제대로 측정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혁신’을 넘어 ‘혁명’을 말하는 시대에 생산성 증대 효과가 바로 뒤따르지 않는 현상에 대해 경제학자들의 해석은 크게 세 가지다. 생산성 증대를 과소평가하는 국내총생산(GDP) 통계상의 측정 문제, 생산성 증대를 제한하는 편중된 기술확산, 그리고 본격적인 생산성 증대로 이어지기까지 걸리는 시차 등이다. 그런데 이 해석은 생산성 패러독스를 극복할 방향도 동시에 알려주고 있다.

솔로의 생산성 패러독스와 관련해 1990년대 중반 이후 미국의 생산성 증가세 회복을 발견한 연구들이 말해주듯이, 생산성은 혁신이 성장에 기여하는 핵심 경로다. 통계적으로 해결해야 할 측정 문제를 제쳐둔다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건 두 번째와 세 번째 요인일 것이다. 국가 경제가 혁신의 확산이나 시차 문제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생산성도, 성장도 크게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우리나라 현실을 돌아보면 생산성 패러독스를 극복할 전략이 보이지 않는다. 혁신의 과실이 소수에게 돌아간다는 불평만 넘쳐날 뿐, 혁신이 중소기업, 서비스업 등 생산성이 낮은 부문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막는 장애물들을 걷어낼 정치적 의지가 없다. 이러니 성장으로 이어질 리 없다.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획일적인 근로시간 단축 등의 충격을 흡수할 방안도 결국 생산성밖에 없는데, 노동정책이 생산성을 높이는 쪽으로 가기는커녕 그 반대로 달려가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기술혁신과 생산성 증대 효과 사이에 시차가 있다는 건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발견되는 공통된 현상이지만, 시차의 정도는 국가별로 다르다. 중대한 기술혁신일수록 이를 수용할 사회적 제도의 ‘재구조화’ 여부에 따라 국가의 비상과 추락이 갈린다는 경제학자 카를로타 페레스의 관찰도 같은 맥락이다.

문재인 정부는 “저성장은 세계적인 현상이고, 우리 경제는 잠재성장률만큼 성장하고 있다”고 말한다. 정부가 저성장을 당연시하면 혁신성장이 설 자리가 없다. 더구나 우리 경제의 잠재성장률 하락 속도는 매우 빠르다. 앞으로 경제성장률이 이 속도에 맞춰 떨어져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정부는 글로벌 경기 하강 전망을 저성장이 불가피한 또 하나의 이유로 삼으려 할지 모르겠지만, 무서운 건 글로벌 경기 하강 속에서 생산성 전쟁을 벌이는 나라와 그러지 않는 나라의 운명이 엇갈릴 그 다음 사이클이다.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생산성이 전부는 아니지만 장기적으로는 거의 전부”라고 했다. 저출산·고령화에 직면한 나라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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