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 논설위원
[천자 칼럼] '불복병(不服病)'

“결승선에 도달하기 전에 무수한 논쟁이 오가지만, 일단 결과가 정해지면 승자와 패자 모두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게 화합의 정신이다. 정당보다 국가를 우선시할 것이다.”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54만 표를 앞서고도 선거인단 숫자에서 아쉽게 진 앨 고어의 ‘승복연설’이다. 존 매케인도 2008년 대선 패배 뒤 격앙된 지지자들에게 “미국이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힘을 합치자”며 통합을 호소했다.

‘깨끗한 승복’ 덕에 고어와 매케인은 ‘위대한 패배자’로 기억된다. 1860년 에이브러햄 링컨에게 패한 스티븐 더글러스 이래 승복연설은 미국이 자랑하는 전통이 됐다. 겉보기에 문제투성이인 미국을 초일류로 만든 리더의 품격이다. 패자는 승복하고 승자는 포용하는 것이다.

반면 한국 정치사는 무수한 불복(不服)으로 점철돼 왔다. 불복해도 정치생명을 이어가니 자꾸 되풀이된다. 이런 ‘불복병(病)’은 증오와 분열의 씨앗이 된다.

경쟁이 치열할수록 패배 인정이 쉽지 않다.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언급한 ‘르상티망(ressentiment)’이 쌓이는 탓이다. 르상티망은 강자에 대한 약자의 원한, 복수심 같은 감정이다. 패배를 남탓으로 돌릴수록 실제 상황과 심리적 부조화가 생겨나고, 그 틈새를 괴담과 음모론이 파고든다. 외환위기 유대인 음모론과 광우병 괴담 등이 그렇다.

우리 사회에 불복병이 만연한 근원을 굴곡진 역사에서도 찾을 수 있다. 조선 양반들은 기회만 있으면 정적을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았다. 이기면 승자독식, 지면 억울한 복수심이 수백 년간 체화된 게 정치판 불복병이 아닐까 싶다.

최근 김경수 경남지사 재판 결과를 놓고 여당 의원들의 ‘재판 불복’이 점입가경이다. 홍영표 원내대표는 “양승태 적폐사단의 조직적 저항이자 보복”이라고까지 했고, ‘재판적폐대책위원회’도 구성했다. 야당이 ‘재판 불복’이라고 비난하자, 여당은 ‘대선 불복’이라며 발끈한다.

이런 와중에 사법부 신뢰는 더욱 땅에 떨어졌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재판부 공격에 침묵하다 어제 “적절치 않다”고 뒤늦게 유감을 표명했지만, 법원 내에선 미흡했다는 비판이 많다.

불복병 환자들에게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이 약효가 있을지 모르겠다. “민주주의 절차는 상호 인정과 토대 위에서 대화와 타협, 경쟁과 승복, 그리고 재도전의 기회보장을 통해서 이견과 이해관계를 통합하는 상생의 정치기술입니다.” 승복할 줄 모르면 민주주의를 말할 자격이 없다.

ohk@hankyung.com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