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제 복을 걷어차 버린 나라'로 돌아가는가
19세기 후반 한국과 일본의 운명을 가른 건 서양 문물에 대한 문호 개방 여부이며, 조선왕조의 쇄국은 그래서 크나큰 패착이었다는 게 통설(通說)이다.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는 저서 《미래를 여는 우리 근현대사》에서 다른 관점을 제시했다. “조선이 쇄국정책을 쓴 것이 아니라 서양이 조선을 외면했다”는 것이다. 무슨 얘기인가.

네덜란드 포르투갈 영국 프랑스 등의 서양인들은 동아시아 지역과 본격 교류를 시작한 16세기에 한 번도 조선을 찾지 않았다. 한반도가 지리적으로 동방항로에서 멀리 벗어나 있던 탓도 있지만, 더 큰 이유가 있었다. “가져갈 게 없었다”는 것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대서양 인도양을 가로질러 항행한 서양인들에겐 갖고 돌아가서 큰돈을 벌게 해 줄 ‘특산품’이 필요했다. 중국과 일본에는 은(銀), 비단, 향신료 등 가져갈 게 풍부했다. 구한말 들어서야 대외 개방을 본격화한 한국은 일본에 비해 서양 문물 수입이 300년 넘게 뒤떨어졌다. 일본이 16세기 말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은 서양의 총포기술로 무장해 승리를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가 이렇게 전개된 데는 조선왕조의 ‘자해(自害)행위’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16세기 초까지 동아시아 3국 가운데 제대로 된 은 제련기술을 갖춘 나라는 조선뿐이었는데, 스스로 밥줄을 끊어 버린 것이다. 연산군 시절 짧은 시간 안에 대량 은 제련을 가능케 하는 기술이 개발되자 중국과 일본에서 조선의 은을 가져가려는 상인들이 몰려들었다. 1506년 ‘반정(反正)’을 통해 왕위에 오른 중종이 ‘사치풍조 척결’을 내세워 은광 개발을 금지하면서 극적인 반전(反轉)이 일어났다. 일본 조정이 조선의 은 제련기술자들에게 접근해서는 “살 길을 열어주겠다”며 기술이전을 얻어냈다. 전 세계가 은(銀)본위체제였던 당시 서양 각국의 매력덩어리였던 은 공급주머니는 이렇게 해서 일본으로 넘어갔고, 한·일 두 나라의 운명을 뒤바꾸는 단초가 됐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주자학적이고 폐쇄적인 세계관에 철두철미 갇혀 있던 조선 조정에 ‘공인(工人)과 상인(商人) 따위가’ 활개 치는 모습은 용납될 수 없었다. 바다 건너에 어떤 세상이 펼쳐져 있으며, 문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일찍이 해외 문물에 눈뜬 일본이 반사이익을 고스란히 챙겼다. 2007년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일본의 이와미 은광은 조선에서 초빙한 기술자들에게 은 제련법을 전수받은 덕분에 번성했다. 일본은 이렇게 생산한 은으로 서양의 최신 물자와 기술을 왕성하게 수입했고, ‘조선 정벌’의 토대를 튼튼하게 닦았다. 임진왜란으로 전 국토가 유린당하고, 그로부터 300여 년 뒤 변변한 전쟁 한번 치르지 못한 채 나라 전체를 송두리째 일본에 빼앗긴 데는 이런 사연이 숨어 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말이 있다. 역사를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게 한 사회와 집단의 행동양식이 각성(覺醒)되지 않는다면 비슷한 운명이 반복되는 건 당연하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이런 ‘운명’을 절감하게 한다. 기업이 거둔 성공을 축복이 아닌 질시와 숙정(肅正) 대상으로 몰아붙이거나, 숟가락 들고 달라붙어 ‘나눠먹어야 할 것’으로 보는 풍토가 빠르게 되살아나고 있다. “우리가 함께 이룬 경제성장의 혜택이 소수 상위계층과 대기업에 집중됐고, 모든 국민에게 고루 돌아가지 않았다”는 대통령의 신년회견에 담긴 인식부터가 그렇다.

기업들을 밤낮으로 뛰게 한 ‘신바람 문화’는 사라진 지 오래다. 기존 기업들을 이을 ‘새싹’도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한다. 신사업 출현으로 사회 전체가 얻게 될 새 동력(動力)보다는 기득권 집단의 이익 침해가 더 크게 조명받는 나라다. 세계적 유전자 분석기술을 갖춘 기업인이 “규제로 질식당해 본사를 중국이나 캐나다로 옮길 수밖에 없다”고 비명 지르는 지경이다. 의료규제에 막힌 네이버가 일본으로 건너가 삼성 LG가 아닌 소니와 원격의료 사업을 하기로 했지만, 정부가 어떤 반성을 했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역사는 그저 되풀이되는 게 아니다. 기억하지 않을 때 되풀이된다”는 말을 곱씹게 하는 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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