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광화문 수난사
광화문(光化門)의 역사는 620년이 넘는다. 조선 개국 직후인 1395년에 건립돼 민족사와 영욕을 함께했다. 처음 이름은 ‘사방에서 어진 사람이 오가는 정문’이라는 뜻의 사정문(四正門)이었다. 지금의 광화문은 1425년 세종대왕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바꾼 이름이다. ‘왕의 큰 덕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의미로 서경(書經)의 글귀 ‘광피사표 화급만방(光被四表 化及萬方·빛이 사방을 덮고 교화가 만방에 미친다)’에서 따왔다.

그러나 광화문의 운명은 순탄치 않았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과 함께 불에 타 없어졌다. 이후 270여 년 동안 폐허로 남아 있었다. 1865년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때 다시 살아났지만 일제강점기인 1927년 총독부 건물에 밀려 경복궁 동쪽으로 쫓겨갔다.

6·25전쟁 때는 폭격으로 목조 부분이 불타고 축대만 앙상하게 남았다. 박정희 대통령 때인 1968년 복원됐지만, 도로 때문에 10m 이상 북쪽으로 밀려났다. 1995년 김영삼 대통령의 경복궁 복원으로 목조구조의 옛 모습을 겨우 되찾았고, 2010년에야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이 과정에서 현판이 다섯 번이나 바뀌는 수난을 당했다. 애초의 한자 원본은 없어지고 한글과 한자로 몇 번씩 바뀌다가 균열과 색상 시비 등의 온갖 논란 끝에 다시 교체될 처지에 놓였다.

광화문 앞의 주요 관아 자리인 육조(六曹)거리도 숱한 변화에 시달렸다. 임진왜란 이후 복구된 육조거리는 조선총독부 건물 때문에 도로로 바뀌었다. 광화문 앞길은 광복 이듬해인 1946년부터 세종대왕 이름을 딴 세종로가 됐다.

노무현 대통령 말기에는 왕복 16차로의 세종로를 10차로로 축소하고 광화문 광장을 신설하는 계획이 수립됐다. 광장이 들어선 2009년 한글날에는 세종대왕 동상이 들어섰다. 이는 1968년 광화문 복원 때 세워진 이순신 장군 동상과 함께 광화문 광장의 상징물이 됐다.

광화문과 육조거리에 다시 불도저의 굉음이 울릴 예정이다. 2021년까지 10차선 도로가 6차선으로 줄고 광장이 3.7배 넓어질 모양이다. 세종대왕과 이순신 동상은 세종문화회관 옆과 조선시대 삼군부 터(정부종합청사 앞)로 옮긴다고 한다. 이를 두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광장을 손본다”는 등의 비판이 나오고 있다.

그동안에도 광화문 일대는 시위와 집회로 몸살을 앓았다. 외국 관광객들은 요란한 시위 깃발을 피해다니며 사진을 찍느라 불편을 호소하곤 했다. 그나마 광화문의 수난사를 어루만지는 것은 이곳에 스민 문화의 향기다. 교보빌딩의 ‘광화문 글판’에는 계절마다 아름다운 시가 걸린다. 거리엔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가 흐른다. 그 사이로 “이젠 광화문을 좀 쉬게 하자”는 목소리도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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