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용석 워싱턴 특파원
[특파원 칼럼] 북한의 '저팔계 외교'와 트럼프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 공사를 지난해 7월 서울에서 만난 적이 있다. 한국경제신문 기자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 겸 인터뷰에서였다. 싱가포르 센토사섬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역사적인 미·북 정상회담을 한 지 한 달쯤 흐른 뒤였다. 그때 태 전 공사는 “트럼프 대통령이 저팔계처럼 언제 어디서나 자기 먹을 건 다 챙겨 먹는 북한의 ‘저팔계 외교’에 당했다”고 비판했다.

그의 설명은 이랬다. “싱가포르에서 미국은 비핵화부터 하자고 했지만 북한은 ‘그동안 북·미 간 신뢰가 없어 비핵화가 안 됐으니, 신뢰 구축부터 하자’고 주장했다. 싱가포르 합의문을 보면 북한 뜻대로 선(先) 신뢰 구축, 후(後) 비핵화 순으로 돼 있다.” 미국이 북한에 비핵화를 요구해도 북한이 ‘합의문을 봐라. 신뢰 구축이 먼저 아니냐’고 하면 ‘논리 싸움’에서 밀린다는 지적이었다. 그 말을 듣고 싱가포르 합의문을 다시 꺼내 봐야 했다.

가능성 커진 2차 미·북정상회담

워싱턴DC에 있으면서 태 전 공사의 말이 생각난 것은 트럼프 행정부가 “2월 중순 베트남에서 2차 미·북 정상회담을 하자”고 북한에 제안했다는 외신 보도를 접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하느니, 마느니 말이 많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을 다시 만나기로 마음을 굳힌 모양이다. 김정은이 갑자기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주석과 네 번째 정상회담을 한 점도 이런 관측을 뒷받침한다. 김정은은 싱가포르 회담 전에도 시 주석을 먼저 찾아가 ‘작전타임’을 가졌다.

이제 공은 북한으로 넘어가는 모양새다. 하지만 막상 회담이 열린다고 할 때 불안한 건 트럼프 대통령이 2차 정상회담에 얼마나 준비가 돼 있을 것이냐는 점이다. 김정은이 올해 신년사를 발표한 뒤 기자는 2005~2008년 북핵 6자회담 때 미국 수석대표를 지낸 크리스토퍼 힐 덴버대 교수와 국무부 군축담당 차관보를 지낸 로버트 아인혼 브루킹스연구소 수석연구원을 차례로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이들은 싱가포르 회담이 실무 단계의 준비 부족으로 제대로 된 성과를 못 냈다고 지적하며 2차 정상회담에서도 똑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다고 걱정했다. 아인혼 전 차관보는 “(2차 정상회담이 열리면) 김정은은 잘 준비가 돼 있을 것”이라며 “문제는 트럼프가 잘 준비돼 있을 것이냐는 점”이라고 할 정도였다.

실무협상 미흡하면 북한에 당해

괜한 우려가 아니다. 북한은 신년사에서 “미국과 더 대화할 용의가 있다”고 했지만 정작 실무협상은 거부하고 있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지난해 11월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과의 만남이 북한의 일방적 취소로 무산된 뒤 아직까지 후속 회담을 못 했다. 미·북 실무협상 책임자인 스티븐 비건 대북정책특별대표는 지난해 8월 말 임명된 뒤 5개월째 북한 측 카운터파트(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를 못 만났다.

트럼프 대통령은 다른 문제로 정신이 없다. 사상 최장의 연방정부 셧다운(일시 업무정지)과 지난 대선 당시 러시아와의 유착 의혹, 과거 성추문 의혹을 조사하는 검찰 수사에 신경이 곤두서 있다. 트럼프 대통령 트윗에선 북한 이슈가 뜸하다.

싱가포르 회담은 적대적인 양국 지도자가 처음 마주 앉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미가 있었을지 모른다. 두 번째 정상회담은 다르다. 북핵 폐기를 위한 가시적 성과를 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에게 당했다’는 평가가 나와서도 안 된다. 정상회담 전에 철저한 실무협상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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