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으로, 과거로 파고드는 국가는
밖으로, 미래로 가는 국가에 밀려
기업인 잇따른 퇴장 심상치 않아"

조일훈 편집국 부국장
[조일훈 칼럼] 집단 우울에 빠져드는 기업인들

1957년생인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이 내년 말 은퇴를 돌연 선언했다. 소유와 경영의 분리방침도 밝혔다. 본인은 오래전에 미리 결정해놓은 인생 설계라고 한다. 하지만 경제인들 사이에선 억측이 나온다. “당국에 뭔가 걸린 것 아니냐”는 것이다. 작년 말 이웅열 코오롱 회장이 은퇴를 발표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모두 60대 초반이다. 얼마 전에는 더 젊은 김정주 넥슨 창업주(1968년생)가 회사를 팔겠다는 소식이 한국경제신문 보도로 알려졌다. 몇 년 전에 이른바 ‘진경준 게이트’ 의혹에 휘말려 재판을 받고 게임산업에 대한 온갖 규제에 시달려온 것이 그의 사업의지를 꺾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당사자들의 진의가 달리 있을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장막 뒤의 배경을 의심하는 세간의 의혹은 가실 줄을 모른다. 그게 한국의 현실이다. 전통적으로 우리 사회는 기업과 기업인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다. 일부 재벌의 불법과 반(反)사회적 일탈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드라마나 영화에서 기업인은 실제보다 훨씬 악마화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세계 무대를 평정한 문화·예술인에 대해선 쉽게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이 훨씬 어렵고 복잡다단한 경쟁을 이겨내야 하는 기업의 글로벌 성공에 대해선 인색한 평가를 내놓기 일쑤다. 반대로 기업 운영상 실수가 나오거나 사업이 후퇴하면 가혹한 공격과 질타가 잇따른다. 사업장 방문 때 여성 승무원들을 강제동원했다는 이유로 고발을 당한 박삼구 금호아시아나 회장은 지난 몇 달간 외부 접촉을 삼가고 두문불출했다. “사실 여부를 해명하기에 앞서 너무 창피했다”고 한다. 경찰과 검찰이 ‘승무원들의 자발적 행사’라고 판단해 무혐의 처리를 했지만 많은 기업인은 박 회장이 느꼈을 모멸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이런 풍토에선 어떤 기업인도 입을 닫을 수밖에 없다. 지난해 9월 평양정상회담에 동행한 기업인들 사이에 회자된 얘기 중엔 이선권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장의 ‘냉면 목구멍’ 발언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4대그룹의 총수 한 사람이 “언론 만나봐야 좋을 것 하나도 없어요”라고 했더니 나머지 사람들이 “맞아요, 맞아”라고 맞장구를 쳤다. 정말 기자가 겁나서 이런 말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활자 너머에 하나라도 꼬투리를 잡겠다고 눈을 부릅뜨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손혜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에게 공개적으로 막말과 욕설을 퍼부어도 멀쩡한 이유는 그가 기업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올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신년사를 내놓지 않았다. 재판이 남아있는 데다 삼성그룹이 계열사별 자율 경영 체제로 전환한 점을 고려했다고 한다. 하지만 재계 1위 총수가 아무런 메시지도 내놓지 않은 것은 삼성을 위해서라도 바람직하지 않다. 박현주 미래에셋 창업주는 모든 계열사에서 공식 직함을 내려놓고 해외사업만 챙기고 있다. 1년이 넘도록 진행되고 있는 공정거래위원회의 강도 높은 내부거래 조사가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도 지난해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나 사실상 대주주로만 남았다. 2년 전만 하더라도 미래지향적 경제단체를 새로 만들겠다고 의기투합한 세 사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영권을 놓아버린 것이다. 사회의 적대감을 내부 침잠으로 버텨내는 집단 우울증에 빠진 듯한 모습이다.

많은 기업인은 자신들에 대한 공격이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 정치적 지형에 비춰볼 때 더 세질 가능성이 높다. 기업인을 형사처벌하겠다는 법안이 국회에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현재 한국의 담론은 국경을 넘어서는 적이 드물고 대부분 과거 문제에 사로잡혀 있다. 눈길을 밖으로, 미래로 돌리는 국가에 뒤처질 수밖에 없다. 기업인들의 잇따른 퇴장은 이런 현실과 떼어놓고 설명할 수가 없다.

ji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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