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포럼] 空間의 사용 가치를 아는 공동체여야
몇 년 전 베트남 하노이의 한 시민공원에서 아침 일찍 싸이의 ‘강남스타일’ 노래에 맞춰 여러 팀이 제각기 춤추고 있는 모습을 봤다. 사회주의 국가 공원 풍경의 하나로 여기고 그냥 지나쳤다. 중국 베이징에서도 이른 아침부터 공원에 모여 태극권뿐만 아니라 체조를 하거나 남녀가 손을 맞잡고 볼룸 댄스를 추는 모습을 많이 봤다. 중국 사람들은 늘 저러려니 했다. 일본에는 아침 일찍 동네 사람들이 모여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구령에 맞춰 체조하는 장소가 도쿄도에만 424곳이다. 규칙을 잘 지키는 일본 사람들의 삶이라고 여기면 그뿐이다.

그러나 그저 넘겨버릴 일만은 아니다. 여럿이 모여 몸을 움직일 공간이 주변에 많고, 그 공간을 그만큼 잘 활용할 줄 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매일 아침 동네 사람들이 모여 체조하고 춤출 수 있는 곳이 얼마나 될까. 나무는 심었어도 동네 사람들이 매일 만나지 못하는 공원은 제대로 된 공공공간이 아니고, 카페에서 공부하는 사람은 공간을 돈과 바꾼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가 말한 ‘공간의 교환가치와 사용가치의 차이’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파리에 있는 뤽상부르 공원은 녹색의 철제 의자를 들고 가 자기가 좋아하는 곳에 놓고 자유로이 앉을 수 있다. 이 의자의 이름은 ‘셰즈(의자) 뤽상부르’. 프랑스 사람들은 이 의자에 앉으면 ‘지금 파리에 있다’는 행복감을 느낀다고 한다. 이 의자는 넓은 공원이란 공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를 물었기 때문에 디자인될 수 있었다. 나무를 가운데 두고 별생각 없이 원형으로 고정한 한국 공원의 벤치는 같이 앉아 있는데도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하게 한다.

공공건물은 물론 공공공간에 대한 논의도 많아졌다. 그러나 대부분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주민을 위해 해주는 어떤 혜택으로만 여긴다. 그렇지만 어디 그런가. 공간이란 언어처럼 읽고 쓰는 것이며 배워야 사용할 줄 알게 된다. 불행하게도 한국은 공간을 잘 가르치지 않는다. 어린이 놀이터는 글자가 없는 공간 언어를 몸으로 배우는 곳인데도, 아무런 생각 없이 업체가 만든 판에 박힌 놀이기구 제품을 가져다 놓은 곳이 허다하다. 초등학교 운동장에 변함없이 서 있는 구령대, 폐타이어로 에워싼 모래밭 놀이터가 있다면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과감히 바꿀 줄 알아야 한다. 교과서는 고작 자기 방에 어울리는 벽지나 커튼 고르기는 가르쳐도, 함께 사는 공동체의 공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 것인지는 가르치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는 일상 공간의 사용 가치를 터득할 수 없다.

프랑스 건축법의 첫머리는 ‘건축은 문화를 표현한다’로 시작한다. 대지, 구조, 설비, 용도 등을 정해 ‘공공복리 증진에 이바지하겠다’는 한국 건축법 제1조와는 크게 다르다. 옥상에 노란 물탱크를 얹은 집도, 담으로 둘러싸여 출입문을 통제하는 ‘빗장동네’도 모두 제각기 그들의 문화를 나타낸다. 그만큼 건축 공간은 사람들의 삶을 표현하는 언어다. “집을 짓는 일과 언어는 함께 시작했다”고 한 인류학자 앙드레 르루아 구랑의 말이 멀리 있지 않다.

글을 읽거나 쓸 줄을 모르면 문맹이다. 글은 쓰고 읽는 게 전부가 아니다.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을 문해(文解)라고 하는데 이를 따지는 것이 실질문맹률이다. 한국은 문맹률은 상당히 낮아도 실질문맹률은 아주 높다고 한다. 그렇다면 일상생활의 언어인 공간을 읽고 쓰지 못하는 것은 ‘공간맹(空間盲)’이고, 공간의 사용 가치를 모르고 그것으로 자기의 삶을 표현할 줄 모르면 ‘실질공간맹’이다. 문맹률이 있으니 ‘공간맹률(空間盲率)’도 있고 ‘실질공간맹률’도 있을 법하다. 공공건물, 공공공간을 사용할 줄 아는 한국의 ‘공간맹률’과 ‘실질공간맹률’은 과연 세계에서 몇 위쯤 될까.

공공건축과 공공공간을 만든다고 다 되는 게 아니다. 공간을 언어처럼 함께 만들고 쓰고 익힐 수 있게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공동체란 어려운 말이 아니다. ‘한 지붕 세 가족’이란 오래된 드라마 제목이 잘 나타내고 있듯이 공동체란 ‘같은 공간’에서 함께 사는 사람들을 말한다. 공간의 사용 가치를 모르는 공동체는 말뿐인 공동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