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국가 부도의 날'과 제2 외환위기

美 금리 인상에 强달러 지속…외환위기 직전과 비슷
재선 노리는 트럼프, Fed 견제…'슈퍼 달러' 저지될 듯
韓, 외환보유액 충분…'삶은 개구리 증후군' 조심해야

한상춘 객원논설위원
[뉴스의 맥] '펀더멘털론' 안주하다간 국가 부도 재발 막지 못해

영화 ‘국가 부도의 날’이 개봉 9일 만에 2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모았다고 한다. 대중영화인 만큼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사실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를 통해 ‘국가 부도’라는 사회적 이슈가 던져진 만큼 우리나라의 국가 부도 재발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 점검해 보는 것은 시대적인 책무다. 국가 부도 재발 가능성을 점검하기에 앞서 개념부터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 이 영화에서는 명확하게 구분돼 있지 않지만 국가 부도를 재정 위기로 본다면 잘못된 것이다. 한국의 재정은 건전하다. 재정 건전성을 나타내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21년 전이나 지금이나 신흥국 위험 수준인 70%보다 훨씬 낮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다루는 국가 부도는 외환위기다. 엄격히 따진다면 외환보유액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컸지만 나라 밖에서는 위기가 곧 닥친다고 경고하는데 정작 당사국인 한국의 각료는 “펀더멘털(경제 기초여건)은 괜찮다”는 안이한 경기진단과 대처, 그리고 부처 간 갈등이 궁극적으로 외환위기를 초래했다는 데 초점을 맞춰 전개되고 있다.

외환위기 당시 대내외 상황을 보면 미국과 다른 국가 간에 따로 노는 ‘대발산(GD·Great Divergence)’이 시작됐다. GD가 시작된 1994년 이후 미국 중앙은행(Fed)은 정책금리를 연 3.75%에서 연 4.25%로 인상한 이후 1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연 6%로 올렸다. 같은 시점에 독일 중앙은행인 분데스방크는 정책금리를 연 5%에서 연 4.5%로 인하했다. 일본은행(BOJ)을 비롯한 미국 이외 선진국 중앙은행도 금리를 내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95년 4월에는 일본 경제를 살리기 위한 ‘역(逆)플라자 합의’ 이후 달러 강세를 용인하는 ‘루빈 독트린’ 시대가 전개됐다. 루빈 독트린이란 달러 강세가 자국의 국익에 부합한다는 당시 로버트 루빈 미국 재무장관의 인식을 바탕으로 펼쳐졌던 ‘슈퍼 달러’ 시대를 말한다. 엔·달러 환율은 달러당 79엔에서 148엔으로 급등했다.

당시 미국 경제는 견실했다. 빌 클린턴 정부 출범 이후 수확체증의 법칙이 적용되는 정보기술(IT)이 주력 산업으로 부상하면서 ‘신경제(New Economy) 신화’를 낳았다. 경제 위상도 높았다. 그 결과 ‘외자 유입→자산 가격 상승→부(富)의 효과→추가 성장’ 간 선순환 고리가 형성돼 전후 최장의 호황기를 누렸다.
[뉴스의 맥] '펀더멘털론' 안주하다간 국가 부도 재발 막지 못해

21년 전과 비슷한 국제 경제 환경

이 과정에서 신흥국은 대규모 자금 이탈에 시달렸다. 1994년 중남미 외채위기,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1998년 러시아 국가채무 불이행 사태까지 이어지는 신흥국 위기가 잇달아 발생(‘그린스펀·루빈 쇼크’라 부른다)했다. 미국도 슈퍼 달러의 부작용을 버티지 못하고 2000년 이후에는 ‘IT 버블 붕괴’라는 위기 상황을 맞았다.

GD가 다시 시작됐다. Fed는 출구전략의 일환으로 2014년 10월 말 양적완화(QE) 종료에 이어 이듬해 12월부터 금리를 인상해오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유럽중앙은행(ECB)은 마이너스 금리 폭을 확대하고 양적완화 시한을 연장했다.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는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추가 금융완화책을 보완하겠다는 의사를 빼놓지 않았고 필요할 때마다 실행에 옮겼다. 아베노믹스(아베 신조 정부의 경제정책)에 한계를 느낀 일본은행도 마이너스 금리 제도를 도입해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Fed와 ECB(다른 선진 중앙은행 포함)는 실물경제 여건 면에서 격차가 크지 않는 한 동일한 통화정책 기조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세계 경제와 국제 금융시장 안정을 기하기 위한 묵시적인 합의 때문이다. Fed와 ECB가 서로 다른 길을 걷는 것은 1999년 ECB 설립 이후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미국 경제는 현재 건실하다. 2009년 2분기 이후 지속돼온 회복세가 내년 상반기까지 지속되면 1990년대를 뛰어넘는 전후 최장의 호황기를 기록할 가능성이 높다. 대부분 예측기관은 내년 성장률이 2%대로 둔화될 것으로 보고 있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2020년 대선’을 앞두고 유일하게 버팀목이 될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으로 예상된다.

트럼프 정부 출범 초의 약(弱)달러 정책이 무역적자 축소에 도움이 되지 못하면서 지난 3월 래리 커들로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 취임 이후 강(强)달러 정책으로 바뀌었다. 신흥국 처지에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제2 루빈 독트린’이라 불리는 ‘커들로 독트린’ 시대가 전개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달러 가치는 펀더멘털 요인과 정책 요인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슈퍼 달러'는 美·신흥국에 최악

올해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국가가 많을 정도로 신흥국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난 3월 Fed의 금리 인상 이후 아르헨티나 등 중남미 국가, 6월 Fed의 금리 인상 이후 터키 등 중동 국가, 9월 Fed의 금리 인상 이후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신흥국의 금융시장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기대할 만한 점은 Fed는 최악의 결과를 낳을 게임을 선택하지 않는 게 전통이라는 것이다. Fed가 추가로 금리를 올려 슈퍼 달러 시대가 전개되면 미국과 신흥국 모두에 최악의 시나리오가 닥칠 가능성이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처럼 슈퍼 달러 시대를 초래한 GD가 더 이상 확대되지 않도록 금리 인상 속도를 조절해 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충분하다. 언제든지 꺼내 쓸 수 있는 2선 외화(캐나다와 맺은 상시 통화스와프 제외)까지 포함한다면 5300억달러가 넘는다. 21년 전 외환위기가 발생할 당시 외환보유액인 300억달러보다 17배 이상 늘어났다. 가장 넓은 의미의 캡티윤 방식에 따른 적정 외환보유액인 3800억달러보다도 훨씬 많다.

하지만 한국 경제의 앞날과 관련해 경착륙, 중진국 함정, 샌드위치 위기, 일본형 복합 불황, 베네수엘라 사태 등 각종 비관론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우리 국민도 90% 정도가 경기가 침체되고 있다고 공감하고 있는데 정작 정책당국은 최근까지 회복되고 있다는 태도를 고수해 왔다. 21년 전 외환위기 당시 경제 각료가 보여준 펀더멘털론과 비슷하다. 해외의 시각도 악화되고 있다. 이달 초 크리스토프 하이더 주한 유럽상공회의소(ECCK) 사무총장은 “한국 경제가 갈라파고스 함정에 빠지고 있다”고 한 적이 있다.

"韓 갈라파고스 함정" 비판 주목을

일부 정책결정자와 집행자는 사실과 다르다는 이유로 이 영화를 보지 않는다고 한다. 분명한 것은 모리스 골드스타인의 위기판단지표, 골드만삭스의 외채상환계수 등으로 평가해 보면 국가 부도(외환위기)가 재발할 가능성은 낮게 나온다는 점이다. 하지만 ‘국가 부도의 날’에 관객이 몰리고 불안해하는 것은 21년 전과 마찬가지로 정책당국의 안이한 경기진단과 대처 그리고 부처 간 갈등이 재연되고 있기 때문이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를 수장으로 한 2기 경제팀이 출범했다. 우리 국민의 불안 심리를 안정시켜야 한다. 1기 경제팀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되겠지” 하면서 경제정책과 운용에 변화를 주지 않으면 ‘삶은 개구리 증후군’에 봉착할 수 있다. 그때는 국가 부도가 재발한다.

sch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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