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포럼] 따뜻한 시선 필요한 갱년기 우울증
이 부장은 오랜만에 아내와 저녁을 함께하자는 약속을 했다. 장소는 젊은 시절 함께 드나들던 허름한 주점이었다. 옛 추억을 떠올리며 문을 열고 아내를 발견한 순간, 이 부장은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드럼통으로 만든 테이블에 앉아 있는 아내의 아우라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남자들만 득실한 곳에서 홀로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다리를 꼬고 능숙하게 고기를 구우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습이 예전의 여린 소녀 같은 느낌이 아니었다. 특히 절대 덥다고 할 수 없는 늦가을 저녁에, 손님 중 유일하게 반팔을 입었다. 이제껏 알고 있던 아내가 아니었다.

소주 한 병만 시켜 놓았으면 여(女)두목 느낌이었을 아내는 갱년기를 겪고 있다. 50세를 전후로 여성호르몬을 분비하는 난소는 수명을 다한다. 신체적으로는 안면홍조(顔面紅潮)를 동반하는 열감(熱感)이 주요 증상이다. 쌀쌀한 날씨에도 ‘반팔 패션’을 고집하는 이유다. 단순히 심리적으로 더운 것이 아니고 뒷덜미가 흥건히 젖을 정도이니, 남들이 보기에는 이상해 보여도 본인에게는 고통이 이만저만 아니다. 심리적으로는 유약해진다. 술 한 잔 걸치면 눈물을 흘리기 일쑤고, 예전 같으면 쉽게 넘어갈 일에도 화를 내거나 짜증이 많아진다. 반면 과감해지기도 한다. 이런 술집에서 혼자 버틸 여자가 아니었다.

적지 않은 여성이 갱년기에 우울증을 앓는다. 호르몬 변화가 감정을 지배하는 뇌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중년 여성 우울증은 얼마나 많을까? 국민건강보험공단 통계를 보면 2017년 우리나라 전체 우울증 환자는 61만4379명에 달한다. 그중 여성은 40만8191명으로 약 66%를 차지한다. 이 중 중년(40~59세) 여성은 13만여 명으로 여성 우울증의 약 32%, 전체 우울증의 약 22%를 차지하니 적다고 할 수 없다.

중년 여성 우울증의 이유는 다양하다. 생물학적으로는 호르몬의 변화가 그 주범일 수 있다. 심리적으로는 감정에 쉽게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는 아직은 약자에 속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최근에는 중노년층 여성이 손주 양육을 전담해야 하는 사회구조 변화가 원인이기도 하다. ‘유리 멘탈’이거나, 유전자가 남다르다거나, 집안환경이 불행해서가 아니니 모든 여성이 중년 우울증의 후보인 셈이다.

중년 여성 우울증은 일반적인 우울증과는 다른 특징이 있다. 가장 큰 특징은 신체적 증상을 동반한다는 점이다. 안면홍조는 물론 두통이나 어지러움, 가슴이 답답하거나 빈번한 두근거림, 손발저림 같은 신체적 증상이 흔하다. 그러므로 내과, 외과, 산부인과를 전전하게 된다. 정확한 원인이 발견되지 않으니 더 답답하고 괴롭다. 또 다른 특징은 건망증이다. 상당수가 치매에 대한 걱정으로 진료를 받다가 우울증 진단을 받기도 한다.

분노 또한 이 시기에 흔히 볼 수 있는 증상이다. 화가 많아지고 충동적이 된다. 심지어 폭력적으로 되기도 하는데 이 또한 호르몬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여성 호르몬이 줄어드니 상대적으로 남성 호르몬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심리적인 요인도 간과할 수 없다. 이 시기부터 발생하는 부부 사이의 치열한 다툼은 과거 억눌린 감정과도 연관이 있다. 우울증이란 ‘상실에 대한 분노가 내게로 향해서 생기는 병’이지만, 때로 그 분노가 밖으로 향해 타인에 대한 공격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쉽게 얘기해서 평소 자식 때문에 참고 참았던 악감정이 폭발하는 것이다.

그럼 중년 여성은 누구나 다 괴롭게 살아야 할 것인가. 심각한 우울증으로 발전해 일상생활을 누릴 수 없다면 조속하고 적극적인 치료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생물학적 변화를 피할 수는 없다고 해도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아직 중년 전이라면 심신의 건강을 유지하는 데 공을 들여야 한다. 이미 시작됐다면 가족의 도움이 절실하다. 사랑하는 이들의 따뜻한 시선과 배려의 말 한마디가 도움이 된다. 부부 또는 가족 사이의 갈등이 큰 이유일 때는 상담을 받으면 좋아진다. 무엇보다 스스로 이 상황을 인정하고 노력해야 한다. 중년은 삶의 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날 당신의 날들이 다시 아름답다고 느껴질 때까지 인내하고 힘을 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