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 칼럼]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
“오늘의 경제성장을 이룩한 것은 기업의 애국심 덕분이다. 우리 기업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2004년 남미를 순방하던 노무현 대통령이 브라질 교민과의 간담회에서 했던 말이다. 노무현 정부 2기를 표방한 문재인 정부는 노 전 대통령의 이 발언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한국의 기업가정신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경제적 민족주의’ 등 서구학자들 주장을 끌어오지 않더라도 ‘애국심’을 빼놓곤 선진국 추격 과정을 다 설명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지금의 글로벌 대기업을 일궈낸 창업 1세대들이 내세웠던 ‘사업보국(事業報國)’이 그 증거라는 것이다. 경제 이론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정신적 동기’가 있었다는 해석이다.

기업이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드는 시대에 무슨 애국심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미국 일본 등 선진국들은 돌파구가 필요할 때마다 알게 모르게 애국심 카드를 꺼내든다. 법인세 인하, 규제 철폐 등 밖으로 나간 자국 기업에 돌아오라고 손짓하는 ‘유턴 정책’도 그중 하나다. 선진국들이 기업하기 좋은 환경 조성에 발벗고 나서면 외국인 직접투자(FDI)까지 제 발로 걸어 들어와 일자리를 창출한다.

우리나라는 반대로 가고 있다. 법인세율은 올리고, 규제개혁은 타이밍을 놓친 지 오래다. 곳곳에서 “여기서 기업할 이유가 없다”는 소리가 넘쳐나고, 들어와 있는 외국인 투자기업조차 다른 나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는 얘기가 들린다.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 기업들이 국가라는 조직 앞에서 경제학자 앨버트 허시먼이 던진 과제를 받아든 모습 같다. 허시먼은 “떠나거나, 남아서 항의하거나, 충성을 다하는 선택(또는 선택의 조합)을 놓고 다양한 경우의 수를 생각하라”고 권하겠지만, 기업들은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리는 형국이다.

당장 남아있던 애국심마저 바닥났다는 하소연이다. 정부가 바꿀 수 없다는 소득주도성장·공정경제·혁신성장이란 ‘3대 패키지 정책’부터 그렇다. 노동개혁은 줄줄이 외환위기 전으로 돌아가는 가운데,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 등을 버티지 못하는 기업들은 “누구를 위한 소득주도성장이냐”고 묻고 있다.

글로벌 경쟁으로 산업생태계가 흔들리는 판국에 대기업을 적폐의 근원으로 몰아가는 공정경제는 중소기업들조차 불안하다고 할 정도다. 밖으로 나가면 가능한 신사업이 안에서는 불가능한, ‘말로만 규제개혁’으로 가득 찬 혁신성장에 기업들은 “더는 기만하지 말라”며 체념한 표정들이다.

허시먼은 기업들이 항의에 나서는 정치적 방법도 있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그것도 혹시나 하는 미련이 남아있을 때나 생각해 볼 수 있는 선택이다. 어쩌면 정권 초기 한 경제단체 간부가 정부 정책과 다른 목소리를 내자마자 대통령이 직접 공격했을 때부터 기업들의 말문이 닫혔는지 모른다. 선진국 같으면 끝까지 제 목소리를 냈을 경제단체도 이미 궤멸된 상태나 다름없다.

결국 개별기업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선택이란 기업을 아예 접을 게 아니라면 ‘탈(脫)한국’뿐이다. 국내 기업의 해외투자에서 외국인의 국내 직접투자를 뺀 순유출 규모가 지난해 286억9100만달러(약 32조원)로 사상 최고치를 또 경신했다. 기업들의 전략적인 해외 투자를 감안해도 대기업·중소기업을 막론하고 ‘코리아 엑소더스’가 아니냐는 우려가 나올 만하다. 이런 속도라면 정부가 아무리 세금으로 일자리를 만든들 기업 이탈로 사라지는 일자리를 메우기도 어렵다.

허시먼이라면 정부가 기업 이탈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국가 운명이 달라질 마지막 가능성을 남겨둘지 모르겠다. 기업 이탈을 국가 퇴보를 알리는 위기 신호로 보고 과감한 정책 전환으로 다시 정상궤도로 돌아가는 국가와 결국 퇴보를 자초하고 마는 국가, 두 가지다. 우리는 어느 쪽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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