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코끼리 옮기기'와 연금 개혁
육상 포유류 중 가장 덩치가 큰 코끼리는 동양에서 성스러운 동물로 취급된다. 아시아 코끼리의 서식지인 인도와 동남아시아 등에서는 종교와 결합돼 숭배되고 있다. 힌두교도들이 가장 숭상하는 신(神)의 하나인 ‘가네샤’는 몸은 사람, 머리는 코끼리 형상을 하고 있다. 불교에서도 코끼리는 신성시된다.

재정학(財政學)에서는 ‘코끼리’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막대한 재정이 소요되는 국민연금이 대표적인 ‘코끼리’다. 연금 수혜자들은 기존에 확보한 연금(코끼리)을 보장받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내고 덜 받는 식의 구조 개혁에 극구 반대한다. 독일 연금 전문가인 카를 힌리히스 브레멘대 교수는 이 같은 연금 개혁의 어려움을 ‘코끼리 옮기기’에 비유했다.

육중한 코끼리를 옮기는 일에는 위험이 따른다. 정권이 무너지기도 한다. 슈뢰더 전 독일 총리, 프로디 전 이탈리아 총리, 고이즈미 전 일본 총리 등은 연금 개혁에 손을 댔다가 중도 낙마하거나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

그런데도 최근 각국이 ‘코끼리 옮기기’에 나서고 있다. 유례없는 저출산으로 보험료를 낼 청년층이 급격히 줄어드는 데 반해 연금을 받는 노년층은 급증해 연금 개혁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어서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80%였던 지지율이 30%포인트나 떨어지는 것을 감수하면서 연금 수급 연령을 60→65세(남), 55→60세(여)로 늦췄다. 벨기에는 연금 수급 연령을 65세에서 67세로 늦추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독일 프랑스 핀란드도 연금 개혁을 진행 중이다.

연금 개혁이 어려운 것은 종류가 많고 가입자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연금 발상지인 유럽에서는 그리스·로마 때부터 군인연금이 시작됐다. 중세에는 군인에게 한정되던 연금이 신부, 공직자 등으로 확대됐다. 근대적 의미의 연금은 독일 비스마르크가 1889년 도입한 근로자 노령·장애보험이다. 20세기 들어서는 연금 가입 대상이 일반 국민으로 확대됐다. 그만큼 덩치가 커진 데다 구조도 다양해서 한 번 설계한 시스템을 바꾸는 게 쉽지 않다.

이런 점에서 정치권과 국민이 합의를 통해 연금 개혁에 성공한 영국과 스웨덴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치인들이 당리당략을 떠나 정확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국민을 꾸준히 설득한 게 주효했다.

‘연금 개혁 실험장’으로 꼽혔던 영국 사례를 《코끼리 쉽게 옮기기》라는 책으로 정리한 김영순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기초자료를 만들어 개혁 반대세력을 설득하고 사회적 합의를 이뤄낸 게 비결”이라고 설명했다.

노동·시민단체의 반발로 국민연금 개편안 국회 제출이 늦춰지고 있는 한국이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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