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북한 교회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에서 불태워진 1866년. 이때 살해된 영국 선교사 로버트 저메인 토머스는 숨을 거두기 직전 최치량이란 사람에게 한문 성경 세 권을 줬다. 이 성경을 전해 받은 박영식은 종이를 뜯어 방 벽과 천장을 도배했다. 이 집은 1893년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 교회로 발전했고, 1907년 한국 개신교의 ‘평양 대부흥 운동’ 중심지가 됐다.

이보다 9년 앞선 1884년에는 한국 최초의 개신교 교회인 소래교회가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소래에 설립됐다. 한국 가톨릭의 역사는 더 앞선다. 1784년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왔으니 230년이 넘는다. 함경남도 덕원에 들어선 성 베네딕토회 수도원은 당시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

일제 강점기를 거쳐 광복이 될 때까지만 해도 개신교와 가톨릭 신자의 3분의 2가 북한 지역에 있었다. 그러나 공산주의 체제에서 신자들은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6·25전쟁을 겪으면서는 반체제 인사로 낙인 찍혀 처형당하거나 월남했다. 전쟁 후 종교시설은 창고·탁아소·휴양소 등으로 전용됐다.

북한에서 종교단체가 부활한 것은 1972년 남북한 대화가 시작되면서부터다. 현재는 조선기독교도연맹·조선천주교인협회·조선불교도연맹·조선천도교중앙지도위원회 등 4개 단체와 이들의 결성체인 조선종교인협회가 있다. 모두 당국의 통제를 받는 관제단체다.

1988년 평양 봉수교회와 칠골교회, 장충성당이 건립됐지만 일반인의 종교 활동은 금지돼 있다. 어쩌다 선전용 교회에 나온 인민들이 감화돼 독실한 교인으로 변하자 그마저 철저하게 규제하고 있다. 1945년부터 2006년까지 처형되거나 투옥된 사람이 1만7000명에 이른다. 미국 국무부에 따르면 지난해에도 북한에서 종교적인 이유로 119명이 처형됐고 770명이 수감됐으며 87명이 실종됐다. 부모 세대부터 신앙을 지켜온 신자들은 당국의 눈을 피해 가정예배소나 지하교회에서 ‘몰래 예배’를 이어가고 있다.

2002년 평양시 낙랑구역에 평양과기대 캠퍼스를 짓던 중 ‘토머스 목사 기념교회당’ 터가 발견됐다. 이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외국 교수들은 매주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북한 학생들과 교수·직원들은 참석할 수 없다.

이런 북한이 최근 ‘교황 초청’ 카드를 꺼냈다니 세계가 의아해하고 있다. 1990년대 초에도 교황을 초청하려다 로마 교황청이 “진짜 신자를 바티칸에 데려오라”고 하자 꼬리를 내린 전례가 있다.

이제는 세상이 달라졌다고들 한다. 교황이 정말로 북한을 방문한다면 북녘 땅에 새로운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고 종교적 자유도 이뤄질 수 있을까. 북한 내 지하교회 신자만 30만~50만 명에 이른다는데 ….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