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 칼럼] '분권(分權)'이란 말이 아깝다
지방을 순회하며 “지방분권은 문재인 대통령 공약”이라고 강조하던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최저임금의 지역별 차등화 요구에 선을 그었다. “예외를 두면 도미노처럼 번지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도 “지역별 차등화는 논의할 틀도 근거도 없다”고 했다. ‘연방제 수준 지방분권’, ‘자치분권’을 내세우는 정부 여당이라 답변이 다음처럼 나올 줄 알았다. “지역이 최저임금 차등화로 해외로 나가려는 기업을 유치해 일자리를 만들고 침체된 지역경제의 활로를 찾을 수 있는지 검토해 보겠다”고. 주요 선진국들은 최저임금 결정에서도 지역 자치를 존중한다. 문 정부의 분권은 어디에 쓰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공공기관 강제 이전도 그렇다. 공공기관은 정부 산하에 있으니 맘대로 지방에 내려보내도 된다거나, 그렇게 하면 지역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분권과는 거리가 멀다. 막강한 중앙권력을 바탕으로 밀어붙이는 획일주의적 균형발전 공식이 더는 통하지 않게 된 지도 오래다.

공공기관 추가 이전을 통한 ‘혁신도시 시즌 2’는, 중앙정부가 도깨비 방망이를 가진 것도 아닐 텐데 공공기관만 내려보내면 혁신도시가 뚝딱 생긴다는 발상의 연장선상에 있다. 혁신도 도시도 ‘진화론’ ‘복잡계’의 관점에서 보는 선진국에서는 지역이 혁신주체가 되지만 우리는 늘 중앙정부가 설계자요, 주체로 나선다. 수도권을 규제해 지방을 발전시킨다는 사고 또한 분권과 어울리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결국 수도권도 지방도 주체가 되지 못해 모두 경쟁력을 잃는 결과를 낳고 있다.

혁신주체를 좌절시키는 분권의 허울은 곳곳에 만연하고 있다. 권한은 정부에 있는데 책임은 대신 져야 하는 ‘가짜 자율’이 그렇다. 국가 미래가 달린 과학기술·교육 등을 담당하는 정부출연연구소, 대학 등의 슬픈 자화상이다. 국가와 시장의 권한 분담도 요원하다.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 자유와 창의를 말하는 헌법과 달리, 국가 권력이 시장을 짓누르며 이들을 좌절시키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심지어 소비자 선택권도 무시당하기 일쑤다.

“규제개혁이 왜 성과를 내지 못하느냐”고 하지만 다 이유가 있다. ‘혁신 생태계’는 과정도 상호작용도 복잡해 누구도 예측하기 어려운 특성을 갖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로의 권력 집중은 생태계를 망치기 딱 좋다. 그래서 영국의 규제개혁은 “정부 권한을 줄이고 혁신주체들과 권한을 나누는 ‘분권화’로 가야 한다”는 철학에서 나온다. 우리 규제개혁이 속도를 못 내거나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이유는 분권에 대한 분명한 철학도 의지도 없기 때문일지 모른다.

정부 여당은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가 하나의 ‘조합’이라고 하지만, 무엇이 우선순위를 갖는지에 따른 ‘순열’로 따지면 무려 6가지 서로 다른 성장론이 나온다. 가령 규제개혁을 통한 분권화가 소득주도성장, 공정경제와의 충돌에서 밀려나면, 혁신성장은 사실상 포기하는 거나 다름없다.

이러니 정부 여당의 성장론에 의문이 제기되는 것도 당연하다. 김병준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새로운 성장 담론의 출발점은 역량있는 국민에게 있다”며 ‘국가주의’가 아니라 ‘자율’을 강조하는 ‘국민성장론’을 들고나왔다. 김 위원장이 “여·야가 성장 담론을 놓고 공개 토론을 해보자”고 하는데 정부 여당이 꺼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정부 여당이 정말 자치분권의 의지를 갖고 있다면 야당의 국민성장론이 말하는 자율과 접점을 찾을 수 있는 영역이 적지 않다. 남·북도 대화를 하는 판국에 여·야가 그런 접점을 찾아내면 협치 공간이 열릴 수도 있는 일이다. 이해찬 대표가 “격이 안 맞는다”며 토론을 거부하는 건 상호존중에서 출발하는 분권의 철학과도 맞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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