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정부 중반기로 접어들던 2006년 하반기는 전국이 집값 폭등으로 몸살을 앓던 시기였다. 서울에서 시작된 투자 광풍이 지방으로 번졌고 서민들의 분노가 고조됐다. 한 해 전인 2005년 종합부동산세를 도입하는 내용의 ‘8·31 종합부동산대책’이 나왔지만 먹혀들지 않았다.

그러자 정부가 꺼내든 카드는 한국은행에 대한 금리 인상 압박이었다. 11월 금융통화위원회 금리 결정을 1주일 앞두고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금융의 해이에서 부동산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발언으로 한은과 금융권을 겨냥했다. 사흘 뒤 국정홍보처는 ‘과잉 유동성 때문에 부동산 가격이 오른다’는 내용의 국정 브리핑을 하고, 다음날엔 김수현 당시 청와대 사회정책비서관이 이례적으로 이성태 당시 한은 총재를 방문했다.

한은은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달 금통위에서 금리를 동결했지만 불과 2주 뒤 통화긴축 필요성을 거론하며 지급준비율을 올렸다. 당시 한은에 근무했던 한 금융권 관계자는 “독립성 논란이 불거지다 보니 금통위에서 곧바로 금리를 올릴 순 없었지만 정부의 압박에 ‘성의 표시’는 해야 한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집값 급등에 또 등장한 '금리 탓'… 韓銀 "우리가 동네북이냐"
정책수단 바닥날 때마다 볼모 잡히는 한은

올 들어 서울 강남 등을 중심으로 부동산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정부의 부동산 정책 실패론이 대두되자 ‘한은 책임론’이 다시 거론되고 있다.

한은 책임론은 여당 내에서 촉발됐다. 금통위원 출신의 최운열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1일 당·정·청 전원회의에서 “시중 유동 자금을 줄이지 않고선 부동산 가격 급등을 잡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같은 당 이철희 의원도 6일 한 방송에 출연해 “이주열 한은 총재 재임 기간 (저금리로) 유동 자금을 많이 풀어 부동산 가격이 잡히지 않는 측면이 있다”고 주장했다.

13일에는 이낙연 국무총리가 대정부 질문 과정에서 “(기준금리 인상을) 심각하게 생각할 때가 됐다는 데 동의한다”며 “금리를 올리지 않으면 자금 유출이나 한국과 미국의 금리 역전에 따른 문제, 가계부채 부담 증가도 생길 수 있다”는 말로 논란을 키웠다.

여권 내부의 한은 책임론에 대해 일각에선 지난해 투기지역 확대 등을 골자로 한 ‘8·2 부동산대책’에도 집값이 잡히지 않는 등 정책 수단이 궁해지자 집값 폭등에 따른 책임을 장기간 저금리 기조를 유지한 한은에 떠넘기려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일고 있다.

‘남대문 출장소’ 논란 재현되나

한은은 1997년 외환위기에 따른 금융개혁 과정에서 중앙은행으로서 통화정책의 독립성을 보장받았지만 이후에도 정부나 여당의 압박에 빈번하게 시달렸다. 이명박 정부 때인 2010년엔 기획재정부 차관이 금통위에 참석해 열석발언권을 행사하면서 독립성 논란이 커지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2013년 4월 조원동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이 기자간담회에서 “한은이 금리를 추가로 내려주면 더 좋다”는 발언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이듬해 최경환 당시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이 총재를 만난 뒤 기자간담회에서 “(이 총리와 만나) 금리의 금 자도 말하지 않았지만 척하면 척 아니겠느냐”는 발언으로 논란을 빚었다. 이 총재는 올초 연임을 앞두고 ‘척하면 척’ 발언이 첫 임기 4년간 가장 곤혹스러웠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또 우리 탓이냐” 부글부글 끓는 한은

한은은 집값 폭등의 ‘공범’으로 지목되는 분위기가 고조되자 당황스럽다는 반응이다. 다음달 금통위에서도 금리 결정이 쉽지 않게 됐다. 경기 등 종합적인 판단에 따라 금리를 올리더라도 자칫 정부에 떠밀려 인상한 것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 십상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한은 내부에서는 정부가 주택 가격 상승 원인을 유동성 탓으로 돌리면서 한은에 책임을 떠넘기려 한다는 불만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윤면식 한은 부총재는 14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최근 주택가격 상승은 전반적인 수급 불균형, 특정 지역 개발계획에 따른 기대심리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가 아니겠느냐”며 “통화정책을 부동산 가격 안정만을 겨냥해서 할 순 없다”고 했다. 부동산 대책의 일환으로 금리 인상 카드를 쓰는 건 적절하지 않다는 뜻으로, 여권과 국무총리의 금리 인상 압박성 발언을 정면으로 받아친 것으로 해석됐다.

한 외국계 투자은행 이코노미스트는 “한은으로선 섣불리 금리를 올렸다가 부채가 많은 자영업자나 서민층의 부담만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란 우려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부동산을 잡기 위한 수단으로 금리 인상 카드를 쓰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고경봉 기자 kg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