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경제적 자유 지키는 나라여야
“특권과 반칙이 난무하는 가운데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은 사회가 되고 말았다.” 지난 1일 당·정·청 전원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한 말이다. 문 대통령은 “국가권력은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익추구 수단으로 전락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나라답지 못했던’ 한국 사회를 비판한 것이다.

‘나라다운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는 문 대통령의 발언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나라다. 이를 구현한다고 한 게 마르크스에서 유래한 ‘소득주도성장’이다. 다른 하나는 “국민주권을 되살리고 국가권력의 공공성을 회복하는 것” 즉, 루소의 ‘주권재민’이다. 과연 이를 통해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 수 있을까.

소득주도성장은 이미 치명적 실패로 나타나고 있다. ‘일자리 증가 5000개’ ‘소득분배 10년 만의 최악’이 그 성적표다. 이 수치는 “이게 나라냐”는 외침으로 탄핵된 전 정부의 실적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다. 소득주도성장은 모든 시민에게 갈등과 가난의 굴레를 씌우는 정책이다.

그럼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주권재민은 어떤가. ‘절대군주의 모든 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이 사상은 ‘독재 권력이 국민을 위해 행사되는 게 아니라 독재자 개인의 이익추구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믿음에서 등장했다. 사람들은 독재자의 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주면 자유와 번영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프랑스 혁명의 바탕이 된 그 이념은 주권자 ‘다수의 지배’다. 주목할 것은 ‘다수의 의지는 오류가 없고, 그 결정 내용이 무엇이든 진리요 법이요 정의’라는 믿음이다. 그러나 아무리 민주정부라고 해도 권력에 제한이 없다면 부패와 탐욕으로 인해 결국 시민들을 속이고 자유를 억압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제한 없는 국가권력은 독재를 부른다. 제한 없는 주권은 자유와 시장의 적(敵)이다.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독일 히틀러의 나치 정부는 국민이 선택한 것이었다. 최근에는 남미 베네수엘라의 예가 흥미롭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우고 차베스와 그의 후계자 니콜라스 마두로는 시민들이 쓰레기통에서 먹을 것을 찾을 정도로 경제를 초토화시켰으면서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지 않은가.

주권재민만으로는 나라다운 나라를 담보할 수 없다. 국가권력을 제어할 아무런 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정부는 최저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 등을 밀어붙였다. 그로 인해 자영업자들이 큰 타격을 받자 이제는 이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임대료 통제, 신용카드 수수료 인하 등을 강제한다. 주권재민의 민주정부라는 명분을 내세워 규제하고, 그 규제를 낳는 국가권력을 행사해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막을 장치는 전혀 없다. 민주정부라는 이유로 정책실패를 방어하기 위해 수십조원의 세금을 쏟아붓는 게 정의로운 일인가.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은 노동조합, 좌파 시민단체, 좌파 정권의 3자 동맹 결과다. 자유로운 시민들이 그런 담합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게 안타깝다.

이익집단과 연합한 정부의 강압적인 탈(脫)원전 정책은 다수의 횡포의 전형적인 예다. 미래 먹거리로 든든하게 마련된 원전을 죽이는 정책으로 인해 많은 시민들이 울고 있다. 개인의 자유와 재산을 보호해야 할 법이 자유로운 시민들을 희생시켜, 정부가 선호하거나 지지한 계층의 권익만 보호하는 형국이다. 이제는 언론 자유는 물론이요 경제적 자유까지도 허물어지고 있다.

국가권력은 폭력, 강제, 사기 등 불의의 행동을 억제해 개인의 자유와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만 사용돼야 한다는 게 자유주의의 유서 깊은 원칙이다. 민주적 국가권력이라고 해도 그 권력은 엄격히 제한돼야 한다. 국가가 그런 과제를 수행한다면 빈곤, 고용, 성장, 양극화 등의 문제는 시장 스스로 경쾌하게 해결한다. 법치국가적 법에 의한 자유가 확립되지 못하고 매일같이 적폐청산의 위협으로 시민들 삶을 불안하게 하는 상황에서는 기업가정신과 투자가 위축돼 경제가 번영할 수 없다. 경제적 자유를 지키는 나라만이 나라다운 나라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