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이념과 기득권 넘어선 에너지 구조 합의를
114년 만의 폭염과 ‘전기료 폭탄’ 우려에서 도드라진 탈(脫)원전 논란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탈원전 논란은 2030년까지 신재생 전력을 세 배쯤 늘리고 원전 역할을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에서 비롯됐다. 신재생 기술의 장기 혁신능력을 활용해 원전 사고와 핵폐기물 우려를 경감하고 장기 에너지·환경복지를 증진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원전 집적 지역인 부산·울산·포항의 지진 대책과 맥을 같이한다.

그러나 과도한 신재생 낙관론은 정치적 선택 영역인 대선 공약이 “비과학적”이란 비판에 직면하게 했다. 특히 신규 원전 건설이 당분간 없다는 점은 세계 최고라는 우리 원전 기술의 가치를 전면 부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원전 관련자들 반발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더구나 원전을 대체할 신재생에너지 육성 논리의 한계가 반발 강도를 높이는 역할을 했다. 114년 만에 한반도를 덮친 폭염은 논란을 더욱 증폭시켰다. 전력 소비 급증과 누진제 전력요금 걱정에다 폭염 뒤끝의 겨울철 블랙아웃 걱정으로 이어졌다. 가정 냉방을 위해 싼 전력을 마음껏 쓰는 단기 에너지·민생복지가 장기 환경복지에 우선한다는 인식이 커졌다. 이 과정에서 원전 가치가 주목받았다.

이에 반해 정부와 탈원전론자들은 저가 전력의 안정 공급이란 원전 역할은 신재생 비중 확대와 에너지 절약 등으로 대체 가능하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안전성 문제로 인해 원전 가치는 갈수록 낮아질 것이란 주장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한쪽 의견만이 옳은 것은 아니다. 원전 옹호론자들은 현행 원전 기술의 구조적 한계를 간과하고 있다. 핵분열 방식의 현행 원전은 폐기물 처리가 미흡한 전형적인 ‘비성숙 기술’이다. 당연히 그 미래는 말처럼 밝지 않다. 서구에서는 기존 원전 포기가 대세다. 핵폐기물 발생과 안전 문제가 거의 없는 새로운 원전 기술의 상용화도 머지않았다.

탈원전론자들 주장은 너무 조급하다. 국민편익 제시보다는 탈원전에 편승한 영역이기주의 구축에 몰두하고 있다. 사실 신재생에너지는 긴 적응 시간과 많은 선행 투자가 필요하다. 특히 자연조건에 따른 공급 불안은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원전과 마찬가지로 ‘비성숙 기술’이다. 신재생은 무조건 좋고 원전은 나쁘다는 주장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에 따른 전력 중심 사회의 도래를 앞두고 전력의 안정 공급에 대한 중요성은 날로 커지고 있다. 미국의 세계 에너지시장 주도, 석유시장 불안, 기후변화 심화 등에 따라 국제 에너지시장의 불안정성은 높아지고 있다. 당연히 에너지 해외 의존도 97%인 국내 시장도 불안하다. 모두 마찬가지로 비성숙 기술인 원전과 신재생 선택에 관한 논란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이다. 국민 복지 증진을 위한 에너지시장 경쟁 여건 조성이 특정 기술 선택에 우선돼야 한다.

이런 사정을 종합할 때 원전과 신재생의 상생조건 합의를 통한 ‘차선의 선택’이 불가피하다. 차선의 선택은 완전시장 달성의 한계와 정부실패 위험을 동시에 고려하는 가운데 점진적 경쟁시장 조성을 우선시한다.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차선의 선택 원칙에 의거해 원전과 신재생을 포함하는 국가에너지 전략의 상생구조를 도출해야 한다. ①모든 에너지는 완전하지 않다. ②에너지 문제 해결은 복합과학적 접근이 필요하다. ③에너지 선택은 특정 시대의 가치만을 대변해서는 안 된다. ④전력 안정공급 필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다. 이런 원칙에 기반하면 2040년 전체 발전량에서 원전과 신재생 비중을 대략 20%씩 비슷한 수준에서 상생구조를 도출해 논란을 종식해야 한다.

각각 20%라는 상생 수준은 원전의 경우 향후 20년 전력안보를 위한 차선책이다. 신재생의 경우는 정부 지원 없는 경제성 입증이 목표다. 그런 뒤에 다양한 경쟁 여건 조성에 정책의 초점을 두고 끊임없이 새로운 상생구조를 도출하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이념 에너지’로 오해받는 신재생과 기득권 이미지를 가진 원전은 이제부터 자체 혁신을 통한 동태적 경쟁력 확보에 주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집단이기주의에 매몰돼온 ‘논란 창출’ 전문가(자칭)그룹과 이해당사자들을 정책 결정 과정에서 퇴출하는 게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