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금은 ‘증시의 수비수’로 불린다. 주로 시장이 급락할 때 매수에 나서 추가 하락을 막는 안전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연기금은 외국인의 ‘셀 코리아’에 가세해 코스피지수를 더 끌어내리고 있다. 수비수가 사라진 국내 증시는 작은 악재에도 뚫리는 일이 잦아졌다. 전문가들은 국민연금의 국내 주식 비중이 연말 목표치에 근접한 만큼 연기금의 매도세가 점차 누그러질 것으로 내다봤다.
연기금의 '배신'… 외국인보다 더 팔았다
◆포트폴리오 조정 영향

21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 6월 이후 연기금은 유가증권시장에서 1조6178억원어치를 순매도했다. 이 기간 외국인(1조1358억원)보다 더 많이 팔았다. 연기금은 코스피지수가 주가순자산비율(PBR: 주가/주당순자산) 1배 밑인 2300선 아래로 떨어졌는데도 좀처럼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7월 이후 외국인은 4512억원어치 순매수로 돌아섰지만 연기금은 매도 규모(1조4136억원)를 더 키웠다.

한 자산운용사 펀드매니저는 “주식시장의 안전판이 사라졌다는 심리적 불안에 하락세가 커지고 있다”며 “국내 증시에 대한 개인투자자의 불신이 더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펀드매니저는 “국내 주식시장이 외국인 수급에 더욱 휘둘릴 것”이라고 우려했다.

연기금의 ‘변심’은 크게 두 가지 이유로 분석된다. 우선 국내 주식의 투자 수익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 연기금 중 가장 규모가 큰 국민연금의 기금운용본부가 공시한 5월 말 기준 자산군별 수익률 자료에 따르면 국내 주식은 -1.18%로 유일하게 마이너스 수익률을 기록했다. 수익률에 따라 포트폴리오를 조절하다 보니 국내 주식 비중을 줄였다는 것이다. 국민연금은 올 들어 해외 주식을 약 6조원, 국내 채권을 5조7000억원어치 순매수하며 비중을 늘렸지만 국내 주식은 1조4000억원어치 줄였다. 국민연금은 국내 주식 비중을 더 축소할 계획이다.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는 5월 말 기준 20.5%인 국내 주식 비중을 2023년 15% 안팎까지 축소해 나가기로 결정했다. 올해 말 비중 목표치는 18.7%다.

기금운용본부장 자리가 1년째 공석이라는 것도 연기금이 국내 주식 투자에 소극적인 이유로 거론된다. 한 자산운용사 대표는 “가뜩이나 보수적인 국민연금에 수장까지 없다 보니 주가가 떨어졌을 때 저가 매수에 나서줘야 하는데 다들 책임을 안 지려고 적극적인 의사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반도체 팔고 엔터주 사고

다만 연기금의 매도세는 연말로 갈수록 누그러질 것이란 전망이 많다. 그동안 대규모 순매도로 국민연금의 국내 주식 비중이 연말 목표치인 18.7%에 근접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이달 들어 유가증권시장에서 하루도 빠짐 없이 순매도하던 연기금은 이날 오랜만에 321억원어치 순매수했다. 이날 외국인(1068억원)과 연기금의 동반 매수에 힘입어 코스피지수는 22.18포인트(0.99%) 오른 2270.06에 마감했다.

연기금이 주식 포트폴리오를 다양화하려는 움직임에 주목해야 한다는 분석도 있다. 그동안 연기금은 주식 포트폴리오 대부분이 자동차, 반도체, 조선, 철강, 화학 등 제조업 중심의 국내 수출 대기업에 집중돼 있다는 것이 문제로 꼽혀왔다.

연기금은 지난 6월 이후 국내 주식 비중을 줄이는 와중에도 코스닥시장에선 1269억원어치 순매수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SK이노베이션 등 대형주들을 내다팔고 카카오, 삼성SDI, LG화학, CJ ENM, 와이지엔터테인먼트 등 전기차 배터리 관련주, 엔터테인먼트주 등을 사들였다. 상장지수펀드(ETF)도 대형주 위주인 KODEX200을 팔고 중소형주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 TIGER KRX300, KODEX KRX300 등을 순매수했다.

윤지호 이베스트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최근 한국 증시가 해외 증시보다 하락폭이 더 컸던 데는 수급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며 “PBR이 1배를 밑돌고 있고 외국인과 연기금의 수급이 개선되고 있는 만큼 코스피지수가 바닥을 다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최만수 기자 bebo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