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감독원이 구두지침으로 임상 3상 이후 연구개발비만 자산 처리가 가능하다는 회계처리 세부기준을 제시한 데 대해 제약·바이오업계가 반발하고 있다. 금감원이 투자자 보호만 강조할 뿐, 미국 등 선진국을 추격하기 위해 투자 유치가 절실한 한국 바이오업계의 현실에 대한 산업적 고려를 전혀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선진국에 비해 열악한 국내 바이오 생태계를 감안하면 “현실을 모르는 처사”라는 업계 주장은 일리가 있다.

신약 개발에만 10년 넘게 걸리는 데다 수조원의 투자가 필요한 게 제약·바이오다. 제약·바이오산업이 발전하려면 이런 특수성에 걸맞은 생태계와 금융·투자환경이 필요하다. 하지만 국내 바이오업계가 처한 환경은 초대형 제약사, 바이오 벤처, 선진적인 금융·투자시스템 등 혁신생태계가 잘 갖춰진 미국 등 선발국들에 비해 열악하기 짝이 없다. 의약품 시장규모, 개발 중인 신약후보물질(파이프라인) 수에서도 미국과는 비교가 안 된다. 금감원이 획일적인 기준을 그대로 적용하면 대다수 바이오 벤처는 적자에 빠지고, 투자 위축으로 이어질 게 뻔하다. 코스닥 상장사 역시 무더기 퇴출 위기로 내몰릴 가능성이 높다.

제약·바이오기업 사업보고서에 기술수출 계약규모, 조건 등을 세부적으로 명시하라는 금감원 가이드라인도 마찬가지다. 글로벌 제약사들이 경쟁자의 시장 진입을 막기 위해 어떤 방해행위를 자행하는지는 긴 설명이 필요없을 듯하다. 영업비밀을 적나라하게 공개하라는 이런 지침은 국내 제약·바이오기업의 경쟁력만 떨어뜨릴 게 뻔하다.

보건복지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업통상자원부 등은 그동안 “바이오는 고령화 시대 유망산업”이라며 이를 육성해왔다. 이런 노력이 금감원의 구두지침으로 물거품이 될지 모르는 상황인데 아무 반응이 없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과거 미국·독일이 선발국 영국에 맞서, 또 일본이 선발국 미국에 맞서 각각 독자적으로 산업을 키워온 과정을 돌아보면 바이오기업들에 대한 규제당국의 전략적 고려가 아쉽다. 제약·바이오 선발국이 추격국을 환영할 리 없다. 금감원이 앞장서 바이오산업의 기회를 앗아가는 우(愚)를 범하지 않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