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호 < 서울교통공사 사장 taehokim@seoulmetro.co.kr >
[한경에세이] 상상력의 크기

얼마 전 싱가포르 출장길에 세계 최대 규모의 차량기지 건설 현장을 다녀왔다. 이 차량기지에는 3개의 지하철 노선과 버스 800여 대를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터미널이 들어선다고 한다. 그런데 차량기지를 짓는 방식이 매우 독창적이었다. 한 건물에서 층을 달리해 노선별 차량기지를 운영할 수 있도록 빌딩형으로 건설한다는 구상이었다. 도시공간과 비용, 안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세계 최초로 빌딩형 차량기지를 생각해낸 대담한 발상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빌딩형 차량기지와 같이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쿠바의 한 어촌마을에서 칵테일을 즐기며 소설을 썼던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창의적 작업의 비결로 음주를 예찬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마라톤과 같은 유산소 운동이 창의력의 비결이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식물을 최고로 꼽는다.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업체 아마존의 최고경영자(CEO) 제프 베저스는 직원들의 창의성을 북돋우기 위해 미국 시애틀 사옥 내부를 400여 종의 나무와 식물로 가득 채우기도 했다.

필자는 혁신을 고민할 때마다 늘 자유로운 상상력의 힘을 빌린다. 현재의 내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 상황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다양한 방식과 입장에서 문제를 보고 생각하는 능력을 키워준다. 특히 안전문제에서 발생 가능한 모든 상황을 상상하는 활동은 예방력과 대응력을 크게 높인다. 상상할 수 있는 만큼 안전해지는 셈이다.

서울 지하철에는 이런 상상으로 빚어진 직원들의 작품이 곳곳에 있다. 선로밀착형 신호등도 그중 하나다. 승강장 안쪽 터널에는 열차 신호등 외에도 지하철 운행을 위한 다양한 구조물이 설치돼 있다. 한 직원은 이것을 보고 신호등이 다른 구조물에 의해 가려지거나 기관사가 다른 구조물에서 나오는 빛을 신호로 오인해 사고가 발생하는 상상을 했다고 한다. 상상은 다른 빛의 간섭을 받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신호등 개발로 이어졌다. 신호등을 기둥으로 세워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탈피해 레일 사이 바닥면에 설치함으로써 기관사는 충분한 안전거리에서 신호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게 됐다.

상상은 보이는 문제를 단순히 들여다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보이지 않는 문제까지 관심을 가짐으로써 시작된다. 그 노력이 습관으로 이어질 때 생각의 근육은 커지고 시대와 분야의 경계 속에서 마침내 창조의 씨앗을 발견할 수 있다. 지금까지 인류가 상상력을 통해 역사를 이끌어온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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