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 칼럼] '모델'에 사로잡힌 사람들
“기술거래가 활성화돼야 벤처기술이 제대로 평가를 받을 수 있고, (그래야) 기업 간 기술혁신형 인수합병(M&A)도 활발해질 수 있다.” 지난해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원회 의장이 한 말이다. 전형적인 ‘선형 모델’이다. 서울대가 개설한 기술경영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물었다. “이 발언을 논평할 사람 있나요?”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한 학생이 입을 열었다. “거꾸로 아닌가요?”

“M&A가 활발해야 벤처기술이 제대로 평가를 받을 수 있고, (그래야) 기술거래가 활성화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역사적 진실은 학생 말에 가깝다. 인지심리학자의 주장을 끌어오면 무엇을 출발로 보느냐의 차이는 엄청나다.

김태년 의장만이 아니었다. 이목희 일자리위원회 부위원장은 한 인터뷰에서 한술 더 떴다. “국가 차원의 기술검증위원회를 구성해 정부가 기술을 검증하고 판로까지 챙기는 시스템을 만들고 싶다”고. 학생들은 웃기만 했다.

문재인 정부 소득주도성장 모델을 설계한 학자들도 다를 바 없다. ‘소득증가→소비증가→투자증가’라고 하지만, 모델대로 굴러갈 경제라면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투자를 고민하면서 기업가의 ‘동물적 충동’ 얘기 같은 건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1950~1960년대 자본주의 황금기에 나타난 ‘투자증가→성장→임금상승→내수확대→성장’을 두고도, 성장이 임금상승을 낳은 게 아니라 임금상승이 성장을 이끌었다고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 앞에선 임금과 생산성의 상관관계도 일방적인 인과관계로 규정되고 만다. ‘생산성 향상→임금상승’은 대기업 논리라며, ‘임금상승→생산성 향상’으로 몰아간다. 중소기업중앙회가 2000~2017년 최저임금 증가속도가 중소제조업 노동생산성보다 2.2배 빨랐다는 그래프를 보여주며 하소연을 하지만 소용이 없다. 최저임금을 그렇게 올리니 그나마 생산성이 증가한 것이고 생산성이 같은 속도로 오르지 못한 건 대기업의 불공정 탓이라는, 판에 박힌 해석이 돌아올 뿐이다.

나라 밖에서 무슨 모델 얘기만 들려오면 지구 끝까지 찾아갈 관료들도 있다. 윤종원 경제수석 등장과 함께 부상한 ‘포용적 성장’ 모델만 해도 그렇다. 그들은 “국제기구, 선진국도 포용적 성장을 말한다”고 한다. 해외 사례가 있으니 딴지 걸지 말라는 관료의 상투적인 수법이다.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포용적 성장은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을 합친 말”이란 해석까지 내놨다.

문재인 대통령도 나섰다. “‘포용적 성장’은 ‘배제적 성장’인 신자유주의와 대비된다”며 “포용적 성장은 큰 개념이고, 이를 구현할 구체적인 방식으로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가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기자들의 의문 제기에 “(대통령이 얘기하는) 포용적 성장은 학술적 의미의 포용적 성장과 다를 수 있다”고 했다. 이쯤 되면 듣는 사람이 곤혹스럽다.

정권이 1년 조금 지난 시점에 ‘사람 중심 경제’, ‘일자리 중심 경제’, ‘소득주도성장’, ‘공정경제’, ‘혁신성장’에, 그 상위 모델로 ‘포용적 성장’이 더해졌다. 모델로 살아날 경제라면 벌써 일어서고도 남았을 테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혁신성장이 걱정이다. 대통령이 규제개혁 드라이브를 걸겠다지만, 당장 포용적 성장을 위한 규제개혁과 배제적 성장으로 규정한 신자유주의 규제개혁을 구분해야 할 판이다. 누군가를 망하게 할 수밖에 없고, 수혜층이 ‘소수’에서 시작해 ‘다수’로 확산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혁신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가정에 가정을 더해 복잡한 현실을 단순화해 나온 게 모델이다. 세계적인 컨설팅 회사들도 모델 장사를 하지만 모델을 깨는 게 기업가정신이요, 혁신성장 아니던가. 하루가 다르게 위기를 절감하는 국민, 기업들에 언제까지 모델 강의가 이어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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