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병석 칼럼] 기업인들이 잠 못 이루는 이유
직원 두세 명을 고용한 구멍가게 주인들도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직원들 월급 날은 왜 이렇게 빨리 돌아오나?” 자영업자든 기업인이든 남의 생계를 책임진 사람들의 근심과 절박감을 보여주는 한마디다. 대기업그룹 회장이라고 다르진 않은 것 같다.

이건희 삼성 회장은 건강하던 시절 임원회의에서 이런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당신들은 어젯밤에 잠을 잘 잤나? 나는 베개 홑청이 땀에 흠뻑 젖을 정도로 밤새 뒤척였다. 반도체 휴대폰 다음에 무엇으로 신입사원들 먹고살게 할지 고민하느라 한잠도 못 잤다.” 수십만 명의 직원을 먹여 살려야 하는 기업인의 중압감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만하다. 대부분 기업인들은 피를 말리며 기업을 경영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게 경쟁 현실이다.

기업인들의 맘고생은 요즘 더 커보인다. 가파른 최저임금 인상과 강제적 근로시간 단축으로 사업여건은 악화일로다. 미·중 무역전쟁은 믿었던 수출마저 흔든다.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인다. 이미 상당수 중소기업은 동남아 등지로 공장을 옮길 계획을 세우고 있을 정도다.

기업들이 한국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으니 경제가 돌아갈 리 없다. 정부는 올해 3% 경제성장을 포기했다. 32만 개를 창출하겠다던 올 신규 일자리 목표는 18만 개로 낮췄다. 주요국 경제는 순항하고 있는데도, 한국 경제만 역주행하는 꼴이다.

경제에 ‘빨간불’이 들어오자 정부와 여당 일각에선 정책궤도를 수정할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혁신성장을 부쩍 강조하고, 소득주도성장 대신 포용적 성장이란 말도 쓴다. 청와대 경제수석을 소득주도성장 주창자에서 경제관료로 바꾼 것도 그런 맥락으로 읽힌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만나는 등 친기업적 행보도 보여줬다.

뒤늦게나마 정부가 정책 방향을 튼다면 다행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안 된다. 기업과 기업인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 한다. 기업은 누가 뭐래도 경제성장의 엔진이다. 일자리 창출의 주체다. 기업이 투자를 늘리지 않으면 아무리 임금을 올려도 경제는 성장하지 않는다. 당연히 일자리도 안 는다.

소득주도 성장론자들은 근로자 임금을 올려주면 소비가 늘고, 소비가 늘면 투자는 증가할 것이라고 쉽게 말한다. 기업 경영 메커니즘과 기업인의 생리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소리다. 기업 입장에서 인건비가 늘어나면 당장 이익이 줄고, 투자 여력이 감소한다. 이게 무서운 기업들은 사람을 더 뽑지 않는다. 최근 나빠진 고용지표가 증거다. 더구나 투자 여부를 결정하는 건 기업인이다. 이들이 미래 수익을 기대하고, 위험을 감수하며 결단을 내려야 투자가 이뤄진다. 그런 기업인을 자기 배만 불리려는 탐욕자로 몰아세우면 과연 투자의욕이 생길까.

그런데도 대기업을 하청업체 쥐어짜서 성장한 약탈자로, 기업인은 벤츠 타고 골프나 치러 다니는 사람들로 보는 시각이 정부·여당의 핵심에 남아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지난 1년여간 정부가 공을 들인 소득주도성장이 성과를 내지 못한 가장 큰 요인이 아닐까 싶다.

혁신성장도 마찬가지다. 혁신의 주체야말로 기업이다. 벤처기업뿐 아니라 글로벌 대기업이 협력 생태계를 구축해야 혁신성장이 가능하다. 4차 산업혁명에서 미국과 중국이 질주할 수 있는 것도 수많은 혁신 스타트업이 구글 아마존과 화웨이 바이두 같은 글로벌 대기업과 얽히고설켜 있기 때문이다.

일부 악덕 기업과 갑질 기업인이 있을 수 있다. 그런 기업과 기업인은 건전한 시장생태계에도 적이다. 공정거래법 등으로 옥석을 가려 도려내야 한다. 다만 부분을 전체로 착각하는 일반화의 오류에 빠지지 않는다는 전제에서다.

동네 빵집 사장부터 대기업 회장까지, 그들은 오늘 밤에도 잠을 설칠 것이다. 그 이유가 열대야 때문만은 아니란 걸 진심으로 이해해야 혁신도 성장도 성공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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