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헌 70주년을 맞는 날이다. 자유민주주의에 바탕을 둔 대한민국 헌법을 만들고 법치주의를 만방에 선포한 날이기도 하다. 건국의 초석이 된 제헌 헌법은 모든 법질서의 기초가 됐고 민주공화국이라는 대한민국의 국체와 정체를 규정한 모법(母法)이기도 하다. 하지만 70년이 흐른 지금, 제헌 헌법의 기초가 됐던 법치주의는 물론 건국 정신마저 위기에 처했다.

법을 만드는 국회부터가 문제다. 국회는 현 정권·이전 정권, 여·야 가릴 것 없이 저질 졸속 입법의 경연장이 돼버린 지 오래다. 표(票)와 대중의 인기만을 좇아 헌법 정신에 맞지도 않는 법을 마구잡이로 찍어내는 게 지금의 입법부다. 다수의 힘으로 방망이를 두들기기만 하면 법이 된다는 식의 입법 횡포 내지는 입법 만능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때로는 정쟁을 위해, 때로는 포퓰리즘으로, 때로는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 입법이 남발된다. “이랬으면 좋겠다”는 시시콜콜한 희망사항을 모두 법으로 만들고야마는 풍조도 입법 과잉으로 이어진다.

대부분 의원입법 형태로 만들어지는 이런 법들은 규제개혁 심사도 받지 않는다. 필요한 예산이 확보됐는지, 법 체계상 맞는지에 대한 심의 절차도 거의 없다. 대한민국이 ‘규제공화국’이 된 데는, 그리고 국회가 ‘법치의 파괴자’라는 말까지 듣게 된 데는 다 이런 무소불위식 입법 행태가 영향을 미쳤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반대로 꼭 필요한 입법은 정쟁의 희생양이 돼 수년간 국회에서 낮잠을 자기도 한다.

대한민국 건국 정신의 퇴색은 또 다른 위기다. 제헌 헌법은 현행 헌법과 달리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명시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의 3대 핵심 요소인 법치주의, 사유재산권, 시장경제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유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고 있음은 자명하다. 분단 직전 경제력이나 기반시설에서 북한에 훨씬 뒤졌던 대한민국이 지금 같은 번영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자율과 사적 자치를 근간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덕분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도 사회 일각에서는 제헌 헌법에서부터 이어져온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훼손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집권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올초 개헌안 논의 중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서 ‘자유’를 빼려다 논란이 일자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교육부는 최근 중·고교 역사교과서 집필 기준에서 ‘자유민주주의’를 ‘민주주의’로 바꿔버렸다. 위헌 논란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이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라는 표현 역시 빼버렸다. 대한민국의 오늘을 만든 기반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국가 정체성을 뒤흔들려는 조직적 움직임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1987년 헌법은 많은 문제점과 모순을 안고 있다. 시장경제를 추구하면서도 국가 개입을 명시한 사회주의적 요소도 적지 않다. 국회 입법 횡포가 본격화된 것도 ‘87체제’ 이후다. 제헌절 70주년을 맞아 위기에 직면한 법치 기반을 다시 세워야 한다. 개헌이 필요하다면 해야 한다. 다만 ‘개헌’이라는 명분하에 저질러지는 ‘헌법정신 파괴’에도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대한민국의 미래가 여기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