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도면 없어도 되는 자리 아닌가?”

[편집국에서] 내 노후자금의 책임자가 1년간 사라졌다
최근 정부 부처나 투자·금융업계에서 회자되는 물음이다. 1년째 공석으로 있는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장(CIO) 얘기다. 강면욱 전 CIO가 사퇴한 지 12일로 꼭 360일이 된다. 그 사이 국민연금 규모는 590조원에서 635조원으로 불어났다. 운용에 미세한 차질이 생겨서 0.1%의 수익만 영향을 받아도 전 국민의 노후자금 중 6000억원 이상이 날아갈 판이다. 하지만 운용 책임자로 누가 오는지, 언제 오는지 1년이 되도록 기약이 없다.

민간 운용사였으면 투자자들에게 배임으로 소송을 당하거나 문을 닫아야 할 상황이다. 하지만 이 사태를 놓고 책임지는 사람도, 묻는 사람도 없다. 대신 최근 CIO로 내정됐던 곽태선 전 베어링자산운용 대표가 어떤 결격 사유로 탈락했는지,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이 인선 과정에 얼마나 개입했는지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국민연금 CIO 자리에 관해선 무관심만 커졌다. 한편으론 “그동안 국민연금이 크게 손해를 봤다는 얘기도 딱히 없고…. 별로 막중한 자리는 아니네”라는 냉소적 시각이 팽배하다.

이전에도 국민연금 CIO의 역할을 낮게 보는 시선이 적지 않았다. 투자자산 배분은 보건복지부 장관이 수장인 기금운용위원회가 정하고, 그에 따른 실제 운용은 실장과 팀장이 맡으니 CIO를 단순히 상징적인 자리처럼 아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는 수장이 없더라도 ‘대충’ 굴러가는 조직이 아니다. CIO의 역할은 상당히 복합적이다. 우선 직원 300여 명을 거느린 기금운용본부의 ‘대표이사’ 역할을 한다. 부서별로 예산을 배분하고 인사를 내고 중장기 관리 전략을 짜야 한다. 급변하는 세계 시장 상황에 따라 투자 부서들을 합치거나 나누고 인원을 적절하게 배치해야 한다. 전산정보시스템 등 각종 인프라도 보강해야 한다. 기금운용본부의 실장급 7명 중 3명의 자리가 비어 있는 초유의 사태가 장기간 이어지는데도 해결이 안 된 것은 이를 챙길 CIO가 없어서다.

글로벌 투자업계와의 네트워크를 긴밀하게 유지해야 하는 것도 CIO의 몫이다. 지금은 정보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세계적으로 투자자금이 풍부하다 보니 유망 투자처를 찾는 데 다들 혈안이 돼 있다. CIO는 주요 투자은행(IB)이나 연기금의 거물들과 만나 정보를 캐고 공동 투자 기회를 모색해야 한다. 한국에선 국민연금 CIO 정도 돼야 골드만삭스 같은 대형 투자사의 수장을 만날 수 있다.

CIO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무엇보다 정부나 국민연금 본부 등 외부로부터 기금 운용의 독립성을 지키는 것이다. 지난 1년간 기금운용본부의 독립성은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됐고 위상은 바닥에 떨어졌다. 기금 운용의 핵심 기능인 의결권 행사 권한을 사실상 뺏기고 인력은 계속 줄었다. 김성주 국민연금 이사장은 “아무리 잘 운용해도 소진될 돈”이라며 “(수익성보다) 차라리 공공성을 높여야 한다”는 말을 공공연히 해왔다. 기금운용본부에선 모 기업의 주주총회 이사 선임 안건에 찬성표를 던질지를 놓고 박능후 복지부 장관에게 허락받는 코미디 같은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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