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 칼럼] 피할 수 없는 플랫폼 전쟁
‘브랜드 로열티’, ‘기술 리더십’, ‘선점 효과’, ‘고객 잠금 효과(lock-in effect)’, ‘수확 체증 효과’…. 교과서가 말하는 ‘퍼스트 무버(first mover)’의 이점이다. 그러나 퍼스트 무버는 막대한 연구개발비, 엉성한 공급·유통망, 관련 기술 및 보완재 부족, 고객 반응의 불확실성 등 이겨내야 할 불리함도 적지 않다. 퍼스트 무버가 멋져 보이지만 현실에서는 최종 승자가 아닌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퍼스트 무버로 성공해도 ‘승자독식(winner-take-all)’은 또 다른 얘기다. 사용자가 늘수록 효용이 커지는 ‘네트워크 외부성’이 작용하는 산업에서는 이론적으로 승자독식이 가능하지만, 실현된다는 보장은 없다. 네트워크 외부성에 대한 사용자 요구가 어느 시장점유율에서 멈추면 둘 이상의 지배적 표준도 가능하다. 스마트폰 시장을 이끄는 안드로이드 운영체제, 애플 운영체제가 그런 사례다. 국가마다 시장이 다르다는 현실 또한 서로 다른 표준의 공존 가능성을 높인다.

난관을 극복하고 승자독식에 다가서더라도 또 다른 변수가 기다린다. 시장점유율이 증가함에 따라 사용자가 누릴 네트워크 외부성 효용보다 독점비용이 더 높아지는 지점에서다. “승자독식은 사용자에게 좋은가?” 묻는 이들이 늘어날 게 뻔하다.

요즘 퍼스트 무버, 승자독식 등을 말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구글, 애플, 아마존, 페이스북, 우버, 에어비앤비 등 미국을 대표하는 플랫폼 기업들이다. 이론대로라면 승부는 끝났다고 해야 할 테지만, 현실에서는 중국 플랫폼 기업이 미국 기업에 맞짱을 뜨는 상황이다. 한국 기업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나?

삼성전자가 독자적인 인공지능(AI) 플랫폼을 선언했다. 이론과 현실은 같지 않다고 생각하면 시도해 볼 만한 도전이지만, 국내 분위기는 중국과는 사뭇 다르다. “지금 해서 언제 따라잡겠나?” “구글 등 미국 AI 플랫폼 기업이 공개한 걸 가져다 쓰는 게 낫지 않은가?” 하는 냉소적인 시각들도 있다.

삼성전자는 AI 플랫폼에서 구글, 아마존 등에 종속될 경우의 위험성을 간파했을 것이다. 지금은 ‘세(勢)’를 불리기 위해 ‘착한 전략’으로 가는 미국 플랫폼 기업이 어느날 ‘공개’를 ‘비공개’로, ‘무료’를 ‘유료’로 바꾸면 그땐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플랫폼은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고 판단한 게 분명하다.

한국이 이론에 사로잡혔다면 반도체, 자동차, 철강 등 지금의 산업 발전도 어려웠을지 모른다. 경제학 교과서의 ‘비교우위론’은 “한국은 할 수 없다”는 답을 내놨지만, “해야 한다”는 기업가정신이 이 이론을 뒤집었다.

‘디지털 전환’이란 변혁기를 헤쳐가려면 플랫폼 기업은 더 이상 선택의 문제일 수 없다. 기업 간 경쟁이 생태계 간 경쟁으로 이동하는 양상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더구나 한국은 스마트폰·인터넷 사용률 세계 1위 국가다. 이 땅에서 플랫폼 기업이 안 나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불행히도 이상한 일은 현실이 되고 있다. 한국 플랫폼 기업은 미국 기업과 싸워보기도 전에 쓰러져가고 있다. 택시업계 ‘카르텔’에 막힌 국내 1위 카풀서비스 ‘풀러스’는 빙산의 일각이다. 대기업, 스타트업 할 것 없이 시장진입을 봉쇄당하는 플랫폼 기업이 줄을 섰다.

“새로운 플랫폼이 기존 플랫폼에 도전할 수 있어야 한다.” 카우프만재단 근무 당시 로버트 리탄이 말한 ‘플랫폼 혁신론’이다. 덧붙이자면 이런 것. “경쟁당국은 ‘경쟁자 보호’가 아니라, ‘경쟁 보호’를 넘어 ‘혁신 보호’를 해야 한다.”(크리스토퍼 메이어·줄리아 커비, 《포스트 캐피털리즘》) 한국 공정거래위원회를 떠올리면 먼 나라 얘기다.

대통령이 규제개혁 속도가 “답답하다”고 할 정도면 기업은 이미 포기하고 한국을 떠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제조기업에 플랫폼 기업까지 나가면 뭐가 남을지 두렵다.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