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 칼럼] '잡놈'이 이끄는 세상에서
“옛 격언은 얘기한다. 권력은 부패한다고. 그렇지만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직은 반대의 경우다. 그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민주주의 국가들 가운데 하나가 ‘완전히 형성된 잡놈(a fully formed rascal)’을 가장 높은 공직에 선출했다는 아직도 당혹스러운 실재(still-dumbfounding reality)를 반영한다.” 지지난달 ‘이코노미스트’에 나온 구절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작은 가업을 대기업으로 키웠다. 그리고 단숨에 대통령이 됐다. 그처럼 출중한 인물이 왜 문제적인가?

근본적 원인은 그의 인품이다. 인품은 식견의 바탕이어서, 천박하고 자기중심적인 인품에선 높은 식견이 나올 수 없다. 워낙 천박하고 자기중심적이다 보니, 그에겐 뜻을 지닌 것은 자신과 관련된 일들뿐이다. 나머지 세상은 그 자신이라는 실재가 펼쳐지는 데 따르는 현상들일 따름이다. 그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오래 진행했다는 사정은 그런 성향을 키웠다. 텔레비전에서 유일한 실재는 화면에 뜨는 것들이다. 그것들을 만들어내는 데 들어간 것들은 화면 속의 실재를 통해서만 뜻을 얻는다.

이번 싱가포르 회담에서도 그에겐 텔레비전 화면에 나오는 자신의 모습이 유일한 실재였다. 나머지는-그동안에 있었던 어려운 협상들도, 다른 나라들의 역할도-모두 그가 주연인 드라마를 위한 현상들이었다. 조연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막판에 출연을 거부하겠다는 위협과 함께 내건 조건들을 모두 들어준 것은 무대 연출을 완벽하게 만드는 데 들어간 작은 비용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사정을 가리키고자, ‘이코노미스트’의 필자가 ‘현실’이라는 뜻으로 썼을 ‘reality’를 나는 ‘실재’로 옮겼다.

트럼프 대통령이 기업가 출신이라는 점도 문제를 키운다. 기업가에게 ‘고객은 왕이다’. 손해 안 나는 거래들은 모두 성공이므로, 늘 적당한 선에서 타협한다. 돈 버는 일에 몰두하다 보니, 이념에 대해선 알지 못하고 자신의 성공 바탕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는 관심도 지식도 없다. 자연히 이념적 측면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외교와 국방에서 기업가 출신 정치 지도자들은 사악한 전체주의 지도자들과의 협상에서 번번이 진다.

45명의 미국 대통령 가운데 기업가 출신은 트럼프와 허버트 후버뿐이다. 후버는 트럼프만큼 부자였지만 인품이 높았고 번 돈을 난민 구호에 썼고 공직 경험도 많았다. 그래도 그는 전체주의와의 대결에서 실패했다. 1931년 일본군이 만주사변을 일으켰을 때, 세계의 기대와 달리 후버는 일본에 경제 제재를 하지 않았다. 미국 기업들의 이익이 손상된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저 국무장관 헨리 스팀슨이 모호한 성명을 내고 끝냈다. 전체주의 일본의 팽창을 막을 기회는 그렇게 사라졌고 10년 뒤 미국은 일본과 힘든 전쟁을 해야 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이 세계화 과정에서 소외되고 우월적 지위를 잃은 백인들이라는 점도 있다. 그들을 겨냥해서 그가 내건 민중주의, 보호무역주의 및 민족주의는 ‘미국 중심의 평화(Pax Americana)’를 허문다.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미국 지도자가 다른 여섯 지도자와 다툰 일이 하도 어이없어서, 나로선 싱가포르 회담의 충격이 그리 크지 않았다.

지금은 한 세기 동안 이어진 미국의 패권이 뿌리째 흔들리는 시기다. 이미 중국은 한 세대 뒤엔 패권 국가가 되겠다고 선언했고, 실제로 그렇게 될 가능성이 점점 커진다. 게다가 아직 군사적으로 강대한 러시아가 공산주의 사회로 회귀하고 있다. 자유주의 국가들이 미국을 중심으로 연합해야 하는데, 지휘관이 자신의 본분을 모르는 상황이다.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운다지만, 그는 미국의 이익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잡놈’이 이끄는 세계에서 약소국 국민으로 살아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삶을 꾸려가는 원리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세상은 복잡하고 모든 일은 서로 연관돼 있으므로, 운은 계속 돌고 돈다. 행운이 작동하려면 그것이 작동할 바탕이 있어야 한다. 작은 바탕이라도 없으면 찾아왔던 행운도 그냥 지나친다.

지금 우리는 둘레의 작은 일들을 꾸준히 해야 한다. 그렇게 할 마음이 나지 않더라도 마음을 추슬러서 그 작은 일들을 해야 한다. 그 길이 또 다른 불운이 작동할 여지를 줄인다는 점만으로도,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