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랩이 싱가포르에 들어오면서 택시 요금 문제로 운전기사와 얼굴 붉힐 일이 없어졌어요.”

[취재수첩] '한국판 그랩'이 나올 수 없는 이유
싱가포르에서 30년 넘게 거주한 한 동포는 차량공유 서비스 그랩의 장점으로 ‘편리함’을 꼽았다. 그랩은 목적지를 지정하자마자 운임이 표시되고 차에서 내리면 자동으로 결제된다. 신용카드 보급이 더딘 동남아시아 특성상 현금 결제도 가능하다. 차를 탈 때 운전자 사진, 차량 종류 등 정보가 제공돼 안심하고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이는 모두 승객의 편익이다. 공유 서비스의 편익은 소비자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손님을 빨리 태울 수 있게 되면서 기사 수입도 올라갔다.

2012년 말레이시아에서 시작한 그랩은 제때 택시 잡기 힘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상에 나왔다. 이제는 삼륜차, 오토바이, 셔틀버스 등 다양한 운송수단으로 서비스를 제공한다. 싱가포르에선 그랩 차량과 택시를 같은 가격에 이용할 수 있는 ‘저스트그랩’을 출시했다. 기존 택시의 사업권을 침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기 시간이 줄어든 기사들은 수입이 더 늘었다며 만족해하고 있다. 기사들의 권익이 높아지자 싱가포르 정부는 그랩의 여러 실험을 허용했다. 새로운 사업을 무조건 막기보다 사회 구성원들의 이익 증진을 먼저 고려한 것이다.

한국에서도 그랩과 비슷한 서비스가 소비자 선택을 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택시업계와 노조 반발을 우려한 정부는 ‘운송 혁신’이 일어나는 길목에서 머뭇거리고 있다. 카카오모빌리티(택시 호출), 풀러스(카풀) 등 국내 차량공유 시장의 성장을 기대한 기업들은 기득권과 구습에 막혀 힘을 잃고 있다.

지난해 360억달러(약 38조8000억원)였던 글로벌 차량공유 시장 규모는 2030년께 2850억달러로 성장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그랩은 이미 도요타, 혼다, 현대자동차 등 대기업들로부터 수십억달러 투자를 받으며 동남아 최고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동남아에서도 새로운 시도에 대한 우려가 없던 것은 아니다. 이를 극복한 것은 ‘소비자의 선택’이었다. 소비자 선택권이 박탈된 현실에서 혁신은 자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