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장애인을 정규 노동자로
혹시 보도블록이 너무 울퉁불퉁하다고 느껴본 적이 있으신지? 보행자 신호가 급해 종종걸음 쳐본 일은 있으신지? 가게마다 출입문에 문턱이 있고 계단도 많아 불편해본 적이 있으신지? 그래서 우리나라 길거리에서는 휠체어나 유모차를 보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계시는지? 이런 것을 고치는 사업이 저출산과 고령화, 양극화 극복을 위한 사회간접자본 대책이라는 것을 알고 계시는지?

장애인의 장애 정도와 능력은 장애 자체뿐 아니라 사회의 지원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장애는 ‘사회적으로’ 정의된다고 한다. 장애인은 능력이 ‘없는’(disabled) 사람이 아니라 다른 능력이 ‘있는’(differently abled) 사람이다.

정부에 등록된 장애인 수는 작년 말 255만 명, 3급 이상 중증장애인 수는 98만 명이다. 2017년 전체 인구 중 고용률은 63.1%였는데 비슷한 시기 경증장애인과 중증장애인의 경우 이 수치는 각각 43.6%, 19.7%였다. “장애인이니 당연하다”는 생각은 전혀 당연한 것이 아니다.

보도를 정비하고, 저상버스 등 이동수단을 확보해주고, 작업보조구를 설치해주고, 능력에 맞는 일자리를 찾아주면 장애인은 남들과 아무 차이가 없는 ‘정규적인 노동자’가 될 수 있다. 이런 노력은 노인에게 같은 혜택을 주고, 임신과 출산, 양육을 편하게 한다. 휠체어가 다니기 편한 거리라야 유모차도 다닐 수 있고 노인들이 넘어지지 않을 수 있다. 서양의 거리에서 휠체어를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장애인이 많아서가 아니다. 한국의 장애인들이 집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청년 남성’ 노동자만으로 경제와 사회를 움직였던 시기는 지났다. 노인과 여성, 장애인에게 “집에 있으라”고 할 처지가 아니다. 이들을 참여시켜야만 경제를 살릴 수 있다. 아이를 한 명 낳은 것과 장애인 한 명을 ‘노동자’로 만드는 것은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 출산은 늘리자고 하면서 장애인은 돌아보지 않는다면 이만저만한 모순이 아니다.

중증장애인의 절반 이상은 충분한 근로능력을 가지고 있다. 중증이든 경증이든 장애인 고용률이 전제 인구와 똑같이 63.1%가 아닐 이유는 없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장애인 직원 비중을 5%로 높이려 한다. 법정의무고용률 3.2%를 훨씬 넘어서서 저출산과 고령화로 지속가능성을 위협받고 있는 건강보험부터 솔선하려는 것이다. 장애인이 일할 수 있는 사회라야 21세기를 넘어설 수 있으니, 이것은 ‘당연한’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