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 칼럼] 한국판 보수·진보 감별법
“나는 배웠다.(…) 무엇을 아무리 얇게 베어내도 거기엔 늘 양면이 있다는 것을.” 오마르 워싱턴의 시(詩) ‘나는 배웠다’의 한 구절이다. 좌우 갈등이 송곳처럼 첨예한 한국 사회에 딱 들어맞는 표현이다.

사사건건 갈리고 시시비비다. 정치, 외교·안보는 물론 경제, 복지, 노동, 환경, 교육 등 예외가 없다. 보수(우파)와 진보(좌파) 사이에 거대한 강이 있는 것 같다. 상대방 주장은 덮어놓고 반대다. 임진왜란 직전 통신사들의 상반된 보고를 연상시킨다. 온 국민이 단합할 때는 축구 한·일전뿐이란 말이 나올 정도다. 개인은 강한데 뭉치면 약해지는 DNA라도 있는 것인가.

페이스북에서 미국 IT업체가 만든 ‘정치성향 테스트’가 유행했지만 금세 시들해졌다. 한국인의 좌우 성향을 진단하는 데 미흡해서다. 이유는 북한이란 변수다. ‘동족이면서 주적’이라는 모순된 존재가 통상의 좌우 구분을 어렵게 한다. 반공과 종북, 친미와 친중의 대립요인이기도 하다. 선진국에선 민족주의가 대개 극우로 연결됐지만, 한국에선 NL(민족민주)식 극좌로 변질된 것도 이례적이다.

이념 대립이 차고도 넘치는데, 정작 이념에 대한 숙의(熟議)나 토론은 안 보인다. 그럴수록 신봉하는 이념의 전파보다 손쉽게 상대방 죽이기에 골몰하게 된다. 다짜고짜 서로를 ‘수꼴’, ‘좌빨’로 비하하고 공격하는 ‘무지(無知)의 이분법’이 판친다. 이런 풍토에서 어떤 사회적 합의가 가능할지 의문이다.

서구 민주주의는 200여 년간 갈등과 숙의의 바탕 위에 정립됐다. 무지개색 같은 정당들은 국민의 다양한 생각을 담는 그릇이 됐다. 반면 ‘압축 민주화’를 이룬 한국에선 뜸들이는 과정이 일천했다. 거대 양당으로 헤쳐모이는 정치로는 국민의 다양한 생각을 담을 수 없다. 그 결과가 ‘그놈이 그놈’이란 정치 혐오와 ‘전부 아니면 전무’식 정치 퇴행이다.

경제 부문은 좌우 갈등의 전선이 더 구체적이다. 경제민주화 대(對) 경제적 자유, 큰 정부 대 작은 정부, 친(親)노동 대 친기업, 재벌개혁 대 노동개혁, 무차별 복지 대 선별적 복지, 부자 증세 대 감세…. 지난 10년간 우리 사회를 쉼없이 달군 이슈들이다. 즉 경제적 보수·진보 구분은 지금의 내 처지가 ‘내 탓이냐, 네(사회) 탓이냐’로 요약된다.

이런 쟁점들의 뿌리를 찾아보면 ‘경제 조로화(早老化)’와 만나게 된다. 성장엔진이 식어가니 키울 것도, 나눌 것도 거의 없어진 셈이다. 정당마다 ‘이념의 아노미’에 빠져버렸다. 정치구도가 왼쪽으로 확 기운 것도 국정농단 논란 못지않게 경제적 불만이 누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라는 슬로건이 먹히는 이유다.

문제는 정치가 이런 식으로 흘러갈 때 그 종착역은 포퓰리즘이라는 점이다. 미국 저술가 존 주디스는 《포퓰리즘의 세계화》에서 “포퓰리스트의 등장은 지배적인 정치이념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수리가 필요하다는 신호이자, 표준적인 세계관이 고장났다는 신호”라고 지적했다. 유럽 포퓰리즘 정당들의 득세, 미국의 지난 대선에서의 트럼프와 샌더스의 약진이 그 사례다. 국내 6·13 지방선거 후보자들의 허황한 공약에는 여야가 따로 없다. 선거를 치를수록 더 할 것이다.

사람의 정치성향에는 집단적 경험 못지않게 유전적 요인도 작용한다. 우파는 대개 위험에 예민하고, 좌파는 변화에 적극적인 성향이 많다고 한다. 따라서 우파성향 경제학자들이 경제위기 가능성에 크나큰 우려를 표명한 것을 청와대는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거꾸로 변화가 필요한 혁신성장은 좌파성향의 청와대 참모들에게 맡기면 어떨까.

조지 레이커프 UC버클리 교수는 “모든 정치는 도덕적이며,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다름’의 문제”라고 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할 때 균형 잡힌 국정운영이 가능할 것이다. 시계(視界)를 미래에 두면 좌우 조화가 얼마든지 가능할 텐데, 아직 그런 정권을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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