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완의 논점과 관점] 보호주의가 '뉴 노멀'이 되는 시대
국가 간 무역분쟁이 생기면 가장 먼저 나오는 얘기가 ‘세계무역기구(WTO) 제소’인 때가 있었다. 우리도 미국, 유럽연합(EU) 등과 무역마찰이 빚어지면 WTO 제소로 해결했다. 승률이 50% 가까이 됐다고 한다. 무역분쟁에 관한 한 ‘해결사’였던 셈이다. 그런데 요즘 국제통상학계의 최대 관심은 ‘WTO 해체’라고 한다. 일부 기능은 이미 마비됐다. 미국이 중국에 무역적자를 빌미로 ‘구매 리스트’를 강요하고 철강 수입에 ‘쿼터제’까지 도입했지만 ‘WTO 제소’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위기에 처한 WTO

통상전문가들에 따르면 WTO는 크게 세 가지 권한이 있다. 첫째는 세계 무역질서를 정하는 입법권, 둘째는 분쟁을 조정하는 사법권, 셋째는 회원국의 무역정책을 평가하고 개선을 권고하는 TPR(trade policy review)이다. 입법권은 다자 간 무역협정을 말한다. WTO는 2001년부터 다자 간 협정인 도하개발아젠다(DDA)를 놓고 논의해왔지만 합의에 실패했다. 사실상 입법권이 정지된 상태다. 사법권도 위기다. WTO 항소기구 재판관은 7명이다. 그런데 미국의 거부권 행사로 후임을 임명하지 못해 현재 4명만 남았다. 오는 9월 1명의 임기가 만료돼 3명으로 줄면 최소한의 업무만 할 수 있다. 내년에 2명이 추가로 임기를 마치면 기능은 정지된다.

WTO의 위기는 역설적으로 자유무역 질서를 주도해온 미국의 보호주의 공세 때문이다. 미국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인 1980년대 ‘슈퍼 301조’를 앞세워 상대국에 무차별 무역보복을 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주로 일본을 겨냥했고, WTO의 전신 격인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번엔 과녁을 중국에 맞혔고, 동맹국들까지 무역보복 대상에 포함시켰다. WTO에 대해서도 “이익을 지키려는 미국의 행동을 방해하고 있다”(USTR 보고서)며 노골적인 배척을 하고 있다.

세계 각국의 대응은 제각각이다. EU는 “미국의 WTO 파괴 시도에 맞서 ‘플랜B’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최근 ‘세이프가드’를 발동하는 등 보호주의 기류에 편승하려는 움직임이 역력하다. 일본은 “미국 없는 WTO는 의미가 없다”며 지켜보자는 태도다.

한국 '제조업 공동화' 우려

반면 중국은 ‘다자주의의 복원’을 강력하게 외치고 있다. 왕이 중국 외교부 장관은 최근 “다자주의를 견지하고 이익 공동체를 구축하는 것이 시대의 흐름에 맞고 각국 이익에도 부합한다”고 말했다. “미국의 ‘역(逆)세계화’에 맞서 중국이 개방, 포용, 호혜, 평등, 상생 등을 원칙으로 하는 신(新)세계화를 주도하겠다는 의미”(장루이핑 중국외교학원 부원장)다. 그러나 동맹국조차 별로 없는 사회주의 국가 중국이 자유무역을 주도할 것으로 보는 전문가들은 거의 없다. 보호주의가 세계 무역질서의 ‘뉴 노멀(새 기준)’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보호주의가 심화될 경우 우리 경제에 가장 우려되는 것은 ‘제조업 공동화’다. 한국의 수출 비중 1, 2위 국가는 중국과 미국이다. 한국은 중국으로부터는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보복을, 미국으로부터는 철강 관세 폭탄을 맞았지만 별다른 저항을 못했다. 이게 기업으로선 울고 싶은데 뺨 맞은 것일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에선 경영환경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 주요 시장 현지로 가는 게 나을 수 있다. 벌써 일부 철강 공장들이 미국으로 옮기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미국은 수입 자동차에 관세 부과를 예고한 데 이어 그 대상을 선박 항공기 반도체로 확대할 예정이다. 정부가 통상 문제에 적극 대응하는 것과 별개로 경영환경도 기업 친화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제조업 공동화’는 빠르게 현실화될 것이다.

tw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