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포럼] 美 이란 핵협정 탈퇴, 중동 역학구도 바뀔까
지난 8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일방적인 핵협정 파기 이후 이란 경제가 직격탄을 맞고 있다. 8000만 인구의 중동 대국 이란의 정치·경제적 위기는 다시 한 번 이 지역의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40년 가까운 국제사회의 경제 제재에 내성이 생겼다고는 하지만 지난 2년간 달러 대비 이란 리얄화의 가치는 거의 반값으로 폭락했다. 2015년 1월, 달러당 3만5000리얄에서 최근 6만5000리얄로 치솟았으니 외환시장은 거의 마비 상태다. 치솟는 생활물가와 18%에 달하는 은행 대출이자율, 12%를 넘는 실업률, 28.4%에 달하는 청년실업률도 큰 불안 요인이다.

경제적 어려움은 작년 12월 대규모 반(反)정부 시위로 이어졌다. 그러나 곧바로 트럼프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시위대를 지지하는 발언을 함으로써 사태가 급변했다. 이란 보수정권이 시위를 외세 개입으로 몰고 가면서 반정부 투쟁의 예봉을 꺾어버린 것이다. 반정부와 반미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는 국민을 재빨리 반미로 돌려세우는 데 성공한 것이다. 강한 반미 정서 때문에 맥도날드 피자헛 버거킹 등이 들어오지 못해 ‘매쉬도날드’ ‘피다햇’ ‘버거하우스’ 등 짝퉁 점포들이 판치다가, 2015년 7월 서방국가들과의 포괄적 핵협정(JCPOA) 타결로 시장이 열리면서 한껏 기대를 모았던 미국과의 진정한 소통 기회도 트럼프 행정부의 극단적인 반이란 정책으로 다시 위기를 맞았다.

핵협정 체결로 국제사회의 경제 제재가 완화되고 석유 수출이 급증하면서 이란 경제는 2016년 성장률 13.4%로 최근 10년 사이 최고의 호황을 누렸다. 2015년 성장률 1.3%에 비하면 거의 10배 이상의 놀라운 약진이다. 그러나 미국의 새로운 고강도 제재가 재개되고 역내 긴장이 고조되면 이란 경제는 4%대 성장률에 머물 전망인데, 중동 전역은 이란 리스크가 더해져서 시리아 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긴장국면 조성이 불가피해 보인다.

2003년 이후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아프가니스탄 전쟁 실패, 시리아 내전을 통한 러시아의 본격 중동 진출, 특히 이란의 영향력이 급속하게 확대되자 이스라엘의 안보 불안과 이란의 경쟁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반발이 거세졌다. 무엇보다 사우디 원유 시설과 담수화 시설 대부분이 밀집해 있는 동부지역이 이란의 직접 공격을 받으면 사우디 왕정 자체의 존립이 흔들리는 상황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반미 벨트 확산과 미국의 영향력 약화라는 상황 타개를 위해 트럼프 행정부는 이란의 위협을 받는 사우디를 기존 ‘미국-이스라엘 협력축’으로 끌어들이면서 새로운 신냉전 구도 구축을 시도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일방적인 이란 핵협정 파기는 이런 시나리오의 일환으로 보인다. 사우디가 이례적으로 즉각적인 환영을 표하고 발표 직후 이스라엘이 시리아 골란 고원의 이란 군사거점을 폭격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미국과 이란의 대치 국면은 핵 문제보다는 보다 근원적인 역학구도의 변화 시도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견해다. 핵협정 체결로 이란이 중동과 국제사회로 뻗어나가는 거센 도전이 너무나 위압적이기 때문이다. 시리아 내전에서 러시아와 이란의 지원으로 바샤르 아사드 정권이 주도권을 잡아나가고, 레바논에서도 이란의 지원을 받는 헤지볼라가 정권을 장악했다. 최근 이라크 선거에서도 친이란적인 알사드르 정파가 압승을 거뒀다. 여기다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마저 이란의 통제권에 놓이자 미국과 이스라엘로서는 사우디까지 끌어들여 이란을 다시 적으로 돌려놓고자 했을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고립을 뜻하는 ‘아메리카 얼론(America Alone)’이 아니라 미국 우선주의인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를 선택한 것이다. 이란에 진출한 2000여 개의 한국 기업에도 미국의 핵협정 파기 선언은 뼈아픈 악재다. 다른 유럽 국가들과 보조를 같이하면서 당분간 미국의 대(對)이란 세컨더리 보이콧을 피해가는 새로운 전략이 시급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