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스위스 크립토밸리가 'ICO 聖地' 된 비결
최근 ‘크립토밸리(Crypto Valley·암호화폐도시)’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스위스 주크시(市)를 다녀왔다. 블록체인과 암호(가상)화폐 시대를 맞아 세계적인 암호화폐 성지로 급부상한 곳이다.

주크시는 스위스 중앙에 있는 주크주(州)의 주도다. 한국의 읍 정도 되는 크기인데 한국의 읍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 주크시를 중심으로 한 주크주에 세계 450여 개 블록체인 기업 중 250여 개가 몰려 있다. 대표적인 기업이 이더리움재단, 비트코인 스위스법인, 지난해 암호화폐공개(ICO)를 통해 3000억원의 자금을 모집해 주목받은 한국의 에이치닥(Hdac) 등이다. 지난해 전 세계의 ICO 39억달러 중 40%가 이곳에서 이뤄졌다.

이러니 “일자리가 아니라 사람이 부족해서 난리”라고 즐거운 비명을 지를 정도다. 인구 12만4000명인 주크주에 글로벌 블록체인 회사 250여 개가 들어서면서 관련 사업서비스를 제공하는 금융, 법률, 회계, 정보통신기술(ICT) 등 각종 고부가가치, 고임금 기업 3만2000여 개가 몰려들었고, 관련 회의도 연이어 열리면서 10만9000개의 일자리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노인과 학생을 제외하면 1인당 두어 개씩의 일자리가 창출돼 사람이 부족해 난리라는 것이다. 그 결과 우수인력을 양성·공급하기 위해 정보통신대학을 확충하는 등 대학들도 변신하고 있었다. 전 세계에서 많은 기업인, 전문가들이 몰려들다 보니 호텔방이 동이 나 필자가 방문했을 때는 관광객이 적은 주중인데도 유스호스텔과 인근 시골의 호텔방을 알아봐야 할 정도였다. 자연히 주크는 금융, 정보통신기술, 사업서비스, 국제회의, 교육, 관광도시로서 혁신을 거듭하고 있었다.

무엇이 이 작은 도시 주크에 이런 혁명적인 변화를 몰고 왔나. 우선 법인세율이 14.6%로 낮다. 외국기업에 대해서는 9~10%까지 더 낮춰 주고 있다. 비영리법인에는 제로세율까지 적용한다. 싱가포르가 법인세율 15%로 경합을 벌이고 있는 점을 감안해 2020년까지 법인세율을 12%로 낮출 계획이라고 한다.

다음으로 규제가 거의 없는 기업환경을 꼽을 수 있다. 스위스는 기본적으로 정부가 주도하는 톱다운(top down) 방식이 아니라 민간의 의견을 수렴해 정책을 수립·집행하는 보텀업(bottom up)방식이 보편화돼 있다. 크립토밸리를 만들기 위해 정부가 한 일은 법인세를 낮추고 규제를 없애고 창의적인 인재를 공급해 주는 비즈니스 친화적 환경을 조성한 게 전부다. 이 덕분에 2013년부터 이더리움재단을 비롯한 글로벌 블록체인기업, 정보통신기업, 금융회사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판교밸리, 마곡밸리 등을 정부가 앞장서 지원·육성하고 있는 한국과는 완전히 다른 보텀업 모델이다. 톱다운 방식이 아닌, 보텀업 모델만이 지속가능하다. 이런 혁신에 힘입어서인지 스위스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지난해 8만6835달러로 룩셈부르크에 이어 세계 2위다. 블록체인 및 암호화폐산업을 규제하고 ICO를 통한 스타트업들의 자금모집을 금지하면서 일자리 창출 목소리만 높이는 한국이 배워야 할 교훈이 아닐 수 없다. 한국도 스위스 크립토밸리 같은 환경 조성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다.